본문에는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칠병이어의 기적 후 바리새인들이 방해한 일,
배를 타고 벳세다로 건너오면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하신 일, 그리고 소경을 치료하신 세 사건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하신 이야기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은유적인 화법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누룩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아하, 주님도 먹을 것을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가지고 오지 못한 떡, 먹지 못한 떡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여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차게 남겼어도 우리는 떡 맛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겨우 한 개만 가지고 왔어.
배는 고픈데 맛도 보지 못했잖아?’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왜 떡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느냐? 떡 한 덩이면 족하지 않느냐? 내가
함께 있으면 한 덩이라도 이 배 안에서 잔치를 할 수 있지 않느냐? 왜 떡에만 관심을 갖느냐? 너희는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나와
함께 있는 곳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어찌 너희가 모르느냐? 이 깨달음이 없는 자들아.” 제자들에 대한 책망은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6장 52절, 7장 18절에서도 “어찌 너희가 깨달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기적과 이적을 직접 보았고, 자기들이 전파하면 귀신들이 굴복하는 능력도 체험했지만 아직도 영적으로 둔감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 요소였습니다.
오래 믿음생활을 하며 주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불평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주님이 곁에 계시다는 것을 깜빡 잊고 불평합니다. ‘지금 나에게 주신 축복이 무엇입니까?’라고 제자들과 같이 둔감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각성을 해야 합니다. 각성하지 못하면 언제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각성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며 더 가까이
하십니다. 이런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게 하시고 늘
감사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예수님께서 성전 연보궤 앞에 서서 가르치실 때에 “내가 가리니……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오르실 것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었지만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자살하러 가는 줄로 오해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해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끝 없이 긴 길과 짧은 길, 쉬운 길과 힘든 길
등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길이든 목적한 장소까지 갈 수 있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길을 선택할 때는 길 자체가 아니라 목적을 먼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잘 선택한 길이라
믿고 열심을 다해 갔는데, 나중에 돌아보면 잘못 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는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는데 “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아침에 길을 제대로 들 수만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楣 夕死可矣)”고 했고, 석가는 길(道)을 찾기
위해 출가해서 10년의 세월을 허비했으며, 도교에서는 길에 대한 관념이란 “최고의 원인이요, 모든 것의 생명체가 되는 길이요, 최고의 완전한
신이 되는 방법이다”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행 4:12). 구원을
위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르시길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를 자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는 우리는 비록 험하고 힘든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끝까지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선택할 때, 주께서 우리 앞에서 혹은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 높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면 그 어떤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잘 감당할 수
있게 새 힘을 주시옵소서. 아멘.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막 9:2-3)
변화(變化)와 변형(變形)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변화는 겉모양은 별로 변한 것이 없지만 내적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이나 행동, 생각이나 철학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바뀐 사람을 ‘변화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형상과 성질이 변화된 경우입니다. 그러나 변형이란 외적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양서동물에 속하는 개구리가 올챙이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과 같은 경우를 가리켜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변형에
대한 말씀이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이름 모를 한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예언을 하고자 선지자의 신분을 숨기어 눈을 가리고 분장을 한 뒤
왕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왕상 20:38).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변형, 바로 예수님의 변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내적으로 변화돼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내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분이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외형적인 변형을 하시고 우리에게로 오신
것입니다(빌 2:6-7).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본질로 보지 못하고 인간인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보았기 때문에 그를 배척하고
말았습니다(막 6:3). 그래서 예수님은 세 제자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신분임을 알게 하시려고 변화산에 오르셔서 변형된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변형된 예수님의 옷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의 외형만큼 희고 깨끗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때 구름이 가리워지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변형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적 변화를 주는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형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주님의 변형의 증인이 됩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증거자가
됩시다.
주님의 변형이 우리의 내적 변화를 위함인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변화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마 9:32-33)
귀신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선악 간에 표출되지 않고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해로운 존재에 대한 표현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해로운 힘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귀신은
익명의 신(神), 즉 악한 일을 하는 신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가리켜 ‘더러운 귀신’(막 1:23), ‘악한 귀신’(눅
11:26), ‘군대 귀신’(막 5:29) 그리고 본문에서는 ‘벙어리 귀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악한 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귀신 들리는 현상을 증명하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미사경본(The missal)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전에 모르던
외국어를 잘 하는 경우, 감추어진 것이나 비밀스러운 것을 잘 아는 경우, 초인간적 힘을 드러내는 경우, 하나님께 속한 것에 대한 혐오감을 갖는
경우 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아홉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 들린 소년 하나를 치유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귀신을 바라보자 귀신은 아이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거품을 흘리게 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주님의 권능은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사람 속에 들어가면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능력으로 그를 결박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서 그리고 주를 믿는 믿음 앞에서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들어 저 바다에도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며(마 21:21), 또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게 됩니다(약 5:15).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귀신이 벌벌 떨기도 하며(약 2:19) 항복하기도 합니다(눅 10:20). 믿음만 있다면 예수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모든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이것이 곧 주님의 권능을 행하는 길입니다.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장로교회 선교사로서 처음 한국 땅을 딛는다.
1885년 4월 5일의 일이다. 그런데 그는 한국에 들어올 때 벌써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온다. 일본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이었던 이수정(李樹廷)이 번역한 마가복음이었다. 1885년 일본 요코하마의 미국성서공회 간행이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들어갈 때 이미 그
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간 유래는 없었다. 한국 개신교회 역사에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필경 그 책이 한국인 번역의 첫
성경이라고 여겼을 언더우드는 한국에 와서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골에도 벌써 만주에서 번역된 한국어 성경이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 서상륜(徐相崙)의 기동성 있는 발걸음이 거기까지 미쳤던 것이다. 1884년 황해도 장연 솔내에 한국인의 손으로는 처음 세워진
교회당을 설립한 그는 이미 1873년부터 이응찬(李應贊)과 함께 만주 주재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로스(John Ross)와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yre)를 도와 성경 번역에 착수하고 있었다. 1882년 심양 문광서원 간행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쪽복음서들이 그
처음 책이었다. 한국이 서서히 개국하기 시작한 것이 1882년의 일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만주와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이 세계와 복음과의
접촉을 얼마나 앞당긴 것이었는가를 새삼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세례를 베풀게 된다. 이것은 이미
한국인을 통해서 스스로 회심한 사람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성직자로서 이들을 성도들의 공동체에 참여시키는 공식적인 세례식이었다는 것이 그의
술회이다. 초대 선교사들이 광범위하게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데는 이와 같이 교인들을 찾아 신앙의 순도를 확인하고 지탱시켜 준다는 목회적인
관심의 의미도 컸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은 압도적으로 성경의 전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국제선교리뷰」의 표현대로
한국인들은 성경을 생활의 최심장부에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실제로 1890년대의 한국에서 10년 동안의 성서 보급량은 중국에서 50년에 걸쳐
보급했던 양과 같았을 정도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막 9:35)
예수님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던 제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의 내용은 제자
열둘 중 ‘누가 크냐’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호령하는 자리를 차지하느냐, 누가 더 주도권을 가지느냐는 다툼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다툼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결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시리라 생각했고, 그때 누가 더 높은
직책을 맡게 될 것인지 다투었던 것입니다. 더 높아지고자 하는 이런 다툼은 오늘날 우리의 부부관계에서도, 형제지간에도, 이웃사이에서도, 교우와의
관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흔한 일입니다.
이 분쟁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지위의 동료만이 아니라 가장 힘 없고 보잘 것 없는 어린 아이 한 명도 섬기고
영접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갈등이
요한복음에 소개됩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하는 도중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보았고 그 일을
금지했습니다. 귀신을 쫓는 치유의 사역은 선한 일입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정작
자신들은 실패했던 귀신을 몰아내는 일을 예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행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같은 이념을 공유하고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같은 방법으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통성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런 다툼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막지 말아라”,
“금지하는 일을 중단하라”며 관용을 명하셨습니다. 선한 사역에 반대하거나 대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역을 지지하는 동조자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권력의 주도권을 추구하는 것도, 배타적인 정통성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제자는
스승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주님께서 본을 보이셨던 섬김의 도를 따라 섬김과 관용을 겸비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섬김이 때로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예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아멘.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막9:50)
주님을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죄는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는 것보다 스스로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버리는 편이 나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심판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렵고 엄중한 심판을 앞두고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발이 범죄하면 발을, 눈이 범죄하면 눈을
제거하여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죄의 근원을 제거하는 비장함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해보면, 우선 죄가 어디에서 오는가, 범죄의 근원은 어디인가가 분명해 집니다. 죄는 인간 외부에 있는 거대한 악의 세력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 눈으로 상징되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입니다. 남의 탓, 환경 탓, 사회 구조 탓, 사악한 세력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려면 자신에게 속해 있는 범죄의 근원을 제거해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정말 육신의 일부를 잘라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지체의 범죄는 근본적으로 우리 심령의 악함에서 비롯됩니다. 죄의 뿌리는 우리 심령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비장하고 철저한 회개, 즉 영적인 수술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철저한 자기회개 여부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여부를 결정한다는
말씀입니다. 냉정한 윤리적 행동이 필요하다거나, 금욕주의적인 자학으로 자기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죄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고
벗어나고자 하는, 구원을 향한 단호한 신앙적 결단과 믿음으로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회개, 전인적인 경건성으로
결단하고 실천하는 일은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것과 같은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처럼 우리 전인격이 죄로 부패하지 않게 막아주는
소금이 없다면, 인고의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의 범죄의 뿌리를 제거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자기 희생의 본을 따르는 사람이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화목을 이룹니다.
구원의 징표인 사랑과 화목이 삶에 가득한 우리가 됩시다.
죄를 향해 기울어지는 경향이 우리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심령을 주님의 사랑으로
감화시켜 주시고, 사랑의 맛을 이웃에게 전하도록 인도하소서. 아멘.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부부관계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혼율 급증은 이제 믿지 않는
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이 위기의 현실에서 어떤 결혼관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중 베뢰아로 추정되는 곳에서 바리새인들과 이혼에 관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베뢰아는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아래 있던 도시입니다. 헤롯은 불의한 이혼과 재혼으로 인해 세례 요한에게서 신랄한 비판을 받은 인물이고 동시에 세례 요한을 처형한
인물입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도시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혼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옳다고 대답하면 도덕성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고, 그르다고 하면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여자에게 수치스런 일이 발견될 때는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여 남자가 재혼할 수 있게 하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수치스런 일’에 대한 해석을 편의로 하여, 율법이 이혼을 허락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혼과 율법은 그렇게 관행과 전통으로
서로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관행이라고 정당한 것도 아니고 전통이라고 만족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근본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성입니다. 부부관계는 육정이나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인간이 고안한 생활방식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인간관계입니다. 창조질서에 따라 마련된 신앙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고려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부부문제를 하나님
중심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이나 애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활의 편리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부부관계의 위기는
하나님 신앙의 위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은 사람이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풍습을 따르거나 법적
허용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하라고 예수님께서는 촉구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신앙 안에서 모든 위기를
해결해야겠습니다.
주님, 인간적인 욕망이나 사회적인 관행이나 명분만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약함을 도우사, 오직
하나님을 기준으로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29)
18세기 유럽에 경건주의가 일어나 영국에서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대각성운동으로 교회를 부흥시켰고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이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친첸돌프 백작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백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별로 뜨겁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박물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죽었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 그 자리에서 그는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삶은 변했습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백작의 명예를 포기한 채 고향을 떠나서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전도의 순례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경건한 삶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왜 버렸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더 귀하기 때문에 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정말 그렇게 믿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것은 모두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얻으면
복 받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많이 받으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던 부자 청년은 율법을 모두 지키고 바른 삶을 산다고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있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와서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갔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하여, 내 믿음
생활을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원하신다면 내게 가장 귀한 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내게 가장 귀한 것인지 한
번 찾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버리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입니다.
내게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버리셨던 주님, 주님을 위하여
내것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아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섬김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믿음입니다. 생명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섬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죽음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또한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신을 죽이는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제물은 반드시 죽어야 됩니다. 대속물이신 주님의 죽음을 통해 죽을 수밖에 없던 생명이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속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을 반대하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예수님께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자신이 죽는 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수고합니까? 내가 살기 위함이요, 내가 자랑하기 위함이요, 내가 도움을 받아 더 윤택하기 위해 수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를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삶이며, 다른 사람들도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지만 결국은 나도 죽게 되는 생존경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적인 삶의 기준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삶을 위한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죽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누구나 그 방법이 주님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현실적인 삶의 방법과 배치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세속적 삶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어야 산다’는 원리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죽는 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죽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알게 하시고 실천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 10:52)
예수님의 치유 중 가장 많이 하신 일은 눈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왜 특별히 눈을 보게
하셨을까요? 그 해답을 주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운 비유를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3-16).
미국의 대각성운동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화니 제이 크로스비(Fany J. Crosby)라는 여인은 7살에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7,000편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 중에서 3,000편이 찬송가와 복음성가로 작곡되었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었으나 영으로 밝은 세상을 보았습니다.
크로스비가 지은 가사가 우리 찬송가에 20여 곡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밝히 보았고 그 결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몸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이 밝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도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우리를 실망시킬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영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상을 보는 사람은 아름답고 깨끗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세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전신 뇌성마비로 누워서 몸을 뒤틀면서 살지만 <나>라는 찬송시에서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라고 외쳤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몸의 눈으로 보면서 즐거워합니까? 아닙니다. 영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즐거워하면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이 나에게 주시는
계시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영으로 믿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조선의 유교는 그 종교적인 국면이 제거되고 현실적인 윤리 기강의 범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에서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언어들이 쓰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당시 조선을 접한 사람들은 조선이 매우 비종교적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가톨릭의 달레(Charles Dallet)는 한국인의 종교란 결국 조상 숭배의 형태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선교사
매켄지(F. A. McKenzie)는 1905년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의식을 집행하는 예배 처소가 하나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영국의 저명한
여행가인 비숍(I. B. Bishop) 여사도 한국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백성인 것 같다며 다만 저급한 신령 숭배인 샤머니즘 형태밖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한국인이 비종교적이라는 인상은 이들 관찰자들이 짧은 시간 한국을 스쳐 지나가면서 가질 수 있었던
주마간산의 감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폄하 여론의 영향일 수도 있었다. 다만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예배 처소가 하나도
없다는 매켄지의 말에서 볼 때, 근대 한국이 외형적으로는 매우 비종교적으로 보여졌음은 확연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오랜 종교적 전통을
알게 되면 한국인이 비종교적이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근대 한국은 비종교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종교의 진공상태를 겪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새크라멘털(sacramental)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새크라멘트는 초월의 반대 개념으로서 서로 이질적인
두 차원의 연결과 교섭 내지는 합일을 의미한다. 복합과 종합 및 총화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인은 찬란한 이론과 엄격한 현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넓은 심연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블랜드(J. O. P. Bland)의 말은 바로 이 점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한국에서 불교는 너무 신비주의에 흘러 한국인의 정서에서 소외되었고, 반면에 유교는 신비주의적이고 정서적인
요소를 빼놓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종교적 갈망에 만족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헐버트(H. B. Hulbert)가 단정한 대로, 근대 한국에서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신비적인 종교인 기독교밖에는 이 백성에게 호소할 종교가 따로 없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 11:9-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벳바게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하고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공식적으로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내셨습니다. 스가랴는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힘으로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몸소 고난받는 종이 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습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합니다.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던 로마의 왕들은 모두 말을 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 인내와 사랑으로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동양의 진시왕이나 징기스칸, 서양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은 모두 당대를 다스리던 왕이었지만 예수님은 역사의 끝날까지 인간을 다스리실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힘과 권력과 무력을
통해서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견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부패해 있었습니다.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시면서 예루살렘의 장래를 걱정하셨습니다(눅 10:41).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한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A.D 70년 경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 주님의 뒤를 따라 우리들도 겸손한
모습으로, 평화의 일꾼으로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아멘.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을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막 11:14)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든 말(Logos)에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 속에도 무한한 힘과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더니 그 다음날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식물도 말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농촌진흥청에서 실험을 해 본 결과 좋은 음악을 듣고 성장한 식물은 발육상태가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음악을 음률이 있는 말로 생각할 때
식물도 말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말의 지배를 받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향해서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다음날 무화과 나무가 뿌리채 말라 있는 것을 본 제자들은 말의 권세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말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한마디의 말이 다른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 사건에서 교훈을 받아 성전 미문 곁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다가가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담대하게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바로 사람의 말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의 권세를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대통령에게는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때문에 대통령은 탱크를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도 탱크를 움직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또한 교통경찰은 과속하고 있는
덤프트럭을 손가락 하나로 세울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권세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말의 권세가 주어졌다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믿음의 말, 비전의 말, 긍정적인 말,
용기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비판하는 말,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 남 헐뜯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귀에 들린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민 14:28).
오늘도 우리에게 말의 권세를 주셨으니 긍정적인 말, 적극적인 말, 일으켜 세우는 말을 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막 12:8-9)
팔레스틴은 날씨가 맑고 늦은 여름밤에는 이슬이 내리는 기후이기 때문에 포도 재배에 알맞은
곳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틴에는 일찍부터 포도원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포도원에는 야생동물이나 침입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두르게
됩니다. 그리고 두 개의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에 포도를 넣고 밟으면 연결된 작은 구멍을 통하여 포도주를 항아리에 담을 수가 있었습니다. 또
포도원을 지키는 망대를 세워서 포도원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당한 규모의 포도원을 만들고 소작을 주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당시의 관례는 50% 정도를 주인에게 소작료로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포도를 수확할 시기가 되었을 때 자신의 종을 보내서
소작료를 받아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정당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이 다른 종들을
보내니 이번에는 때릴 뿐만 아니라 그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결국에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본
포도원 농부들은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모든 것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 아들까지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아주
잔인하게 시체를 들판에 내어버려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과장 없이 보여줍니다. 주인의
관용은 한없이 커지고 넓어지는 데 비해 농부들의 완악함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더 완악해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멸시를 받고 죽은 예수님이지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막 12:10). 솔로몬의
성전터에서 운반된 석재 중 성소의 건축에 부적당하다고 거절된 그 돌이 오히려 성전문의 기초가 되었다는 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부정하고 거역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살려 내시고 열방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완악한 저희들의 마음에
함께하셔서 진리를 바로 알게 하소서. 아멘.
독일의 철인 니체는 이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기독교의 사랑의 도덕을 ‘노예 도덕’이라
하면서, 기독교가 인간의 건강한 생명을 부패시키고 죽여버렸다고 혹독한 비평을 했습니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본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 문학,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25세에 바젤 대학의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교회는 무덤이요 하나님은 허수아비”라고
망발을 했고, 말년에는 정신질환으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 불행한 사람으로 살다가 숨을 거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도덕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니체가 말한 노예 도덕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용기입니다. 기독교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더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과 자비와 용서야말로 진짜 용기입니다. 크리스천은 남을 때릴
용기는 없으나, 때리는 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으로 용서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도덕은 또한 기도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만나서 누구를 따르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으며,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성공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을 따르면 실패할 위험이 많고, 성공한 사람을
따르면 성공할 확률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승리와 성공은 반드시 그 원인과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기도 속에 위대한 성공의
힘과 믿음으로 승리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소망과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뼈를 깎는 아픈 기도가 있어야 성공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 승자와 패자가 있습니다. 실패하고 낙오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무슨 일에나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수치와 고통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망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지금
우리는 패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용서라는 용기를
가지고 기도를 쉬지 않아, 산 자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승자의 삶을 살아갑시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동안 외딴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석방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백인의 탄압과 압정을 극복하고 마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먼저 회개하고 일치하고 용서할 수 있는 그 마음을 주소서!” 그런데 그가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본 그 마음으로 감옥생활을 이겨 냈다고 합니다.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데스 몬드 투투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억압받던 인종이나 부족이
주도권을 탈환한 여러 나라에서 복수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광경을 숱하게 보아온 만델라는 이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은
진실규명과 화해로 보복심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감동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보복이 두려워 떨다가 화해와 용서의 선언을 듣고
회개하며 감동을 했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백인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범행을
털어놓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 범죄로 인해 재판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문회 자리에서 반드 브렉이라는
경찰관이 자기의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 소년을 총으로 쏘고 시체를 불태운 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 시신을 바베큐처럼
불에 그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8년 후 반드 브렉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했는데, 불쌍한 그 아내는 경찰관들이 남편을
장작더미에 묶어놓고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이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다고 합니다.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법정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판사는 물었습니다. “반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부탁한 후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반드 브렉 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반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반드 브렉 씨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요, 희생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 3:10)
애굽의 바로는 요셉의 공로를 무시하여 이스라엘을 탄압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늘고 힘이 강해져 애굽의 위협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강제 노동에 징용하여 고역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고되게 하여 출생률이 줄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학대 속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셨습니다. 첫 번째 계략이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계략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남아를
나일강에 버려서 살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가 직접 나섰으니 잔인한 술책이요 무자비한 탄압이었습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은 싸울 무기나 수단이
없었고 훈련받은 장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웠습니다. 이때에 모세가 출생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준수함을
보고 죽일 수 없어 3개월 동안 숨겼다가 나일강에 띄웠고 인정 많은 애굽의 공주가 그를 건졌습니다. 두 번째 계락도 실패한
것입니다.
모세는 궁중에서 40세까지 천문, 수학, 미술을 배웠습니다. 역사가 요세퍼스에 의하면 모세는 대군을 거느리고 에디오피아
군과 싸워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모세는 청년시절까지 왕실에서 성장했고 학문을 통달했습니다. 얼마든지 입신출세 할 수 있는, 장래가 보장된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의 왕궁보다 동족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역사상 위인들은 모두 압박받는 백성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모세 또한 왕실에서 자라면서 하루도 자기 백성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어느 날 자기 백성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서로
싸우느냐?” 종살이 하는 동포가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분열되는 것을 보고 속이 몹시 상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선봉에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결심했고 결국엔 민족의 해방자이며 민족의 구원자로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누가 훼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담을 만한 인격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개신교회가 전래되던 무렵 근대 한국은 민족의식을 새삼 강조하고 또 그 형성을 예민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본디 오랜 세월 단일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가져온 한국이지만 조선에 들어와서는 두 차례의 전란과 더불어 서양 문명국의 위력을
직간접적으로 겪어 오던 터였다. 더욱이 쇄국의 방침을 굳건히 고수하던 그때 민족의식의 강조는 쇄국의 한 방책으로서 채택되고 있었다. 외국은
그것이 서양이든 일본이든 우리 민족이 아닌 바에야 국가와 민족 정체성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필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지난
100년 동안 반민족적 인상을 굳게 심어 온 가톨릭교회의 역사로 인해 기독교 문명국인 서양은 더욱 의심스러운 대상이었다.
이는
동학(東學)이 처음 예수교를 대했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1893년 3월 16일 예수교에 대한 동학의 실질적인 반발이 가시화되었다. 동학도가
광화문에서 교조 신원을 위한 복합 상소로 호곡하던 때였다. 그때 미국 선교사 기포드(D. L. Gifford)의 학당 문전에 ‘야소교 배척
방문’이 나붙는다. 그리고 얼마 후 4월 초에는 감리교 선교사 존스(G. H. Jones)의 집에 ‘목사 퇴거 방문’이 첨부되었다.
“혹세무민(惑世誣民)과 이단성이 가득한 이 종교가 조약 중에도 없는 전교를 함부로 하고 교육을 빙자하여 양가 자제들을 개종시키고 있어 그
비루함이 이에서 다시 없다”고 하면서 기한부 퇴거를 협박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894년 7월 동학의 거센 움직임이 다시 일어날
때 예수교에 대한 자세에 변화가 나타난다. 이때 동학의 투쟁 목표는 왜의 오랑캐를 진멸하자는 것이었고 따라서 서양 배척의 항의는 빠지고 있었다.
서양과 일본 배척의 주장에서 일본 배척의 주장으로 동학의 투쟁 목표가 전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일본과 서양은 하나가 아닌 둘로, 다른
것으로 경험된 것이다. 그해 12월 동학계에서 발표된 문서에는 도는 다르나 척왜와 척화는 그 뜻이 일반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본을 배척하자는
척왜와 외국과의 화약을 배척하자는 척화가 쇄국의 시대에 조선의 일반적 정서였다. 그런데 ‘도는 다르지만’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믿고 있는
종교가 달라도 척왜와 척화에서 하나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교의 척왜성이 그때 이미 눈에 띌 만큼 현저하게 표면화하였던 것이다.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2-3)
‘가르치다’, ‘복음을 전하다’, ‘고치다’의 세 가지 동사는 주님과 교회 사역의 본질을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로 치우치거나 혹은 어느 하나가 생략되어 버리면 온전한 모습의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고치셨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주님의 가르치심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곳은 정말 가르치기에 적절한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산에 올라가 앉으시는 모습은 강단을 닮았습니다. 그곳은 ‘하틴의
뿔’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약간 위로 솟은 봉우리가 있고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평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곳의
봉우리에 앉으셨습니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서서 가르치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앉아서 가르치시는
것이 가장 정식적이고 공적인 가르침의 자세였습니다. 주님은 앉아서 자세를 잡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평온하였고 앞에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조건과 준비가 완벽했습니다.
들려진 말씀은 복의 말씀이었습니다. 아아! 얼마나 참된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그와 같은 복음 듣기를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습니까? 건강하고 오래 살라든지,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지라든지 하는 세상의 복과는
차원이 다른 말씀이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쉬운 말씀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그 말씀에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모두 그
말씀이 이해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배움에는 논리적 이성보다 열려진 마음이 더욱 중요한 법이니까요.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세상의
복을 따라가다가 복이 화가 된 인생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마카리오이!’
우리말로 원문의 어감을 그대로 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순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원문대로 읽으면 이런 말이 됩니다. ‘아!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왜냐하면 그들은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는 미련하고 무지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 놓사오니
오셔서 저에게도 복의 말씀을 들려 주옵소서. 아멘.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예수님은 무언가 달랐습니다. 그분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달랐습니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시는 말씀과 달랐습니다. 힘이 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달라서일까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 자신이 율법이요 선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완성하고 초월하는 분이었습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키며 선지자의 말씀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로 구성된 전선지서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와 같은 후기 예언서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 전체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것들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상처만 입었습니다. 세상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다가 실망한 상처 입은
영혼들은 ‘말씀에 대해서’ 듣기보다는 ‘말씀 자체를’ 만날 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듣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
부족합니다. 사람을 바꾸어 가면서, 교회를 바꾸어 가면서 완전한 말씀을 기대하지만 기대가 충족되는 때는 없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자주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율법을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문제만 만들어냅니다. 교권수호를 위하여 파당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심판하는 데에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형제에
대하여 그들은 ‘들어오라고 하지’ 못하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를 들고 율법과 선지자를 나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에 율법을, 왼손에 선지자를 들고 자신을 비우기만 했다면 그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고, 그것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아, 욕심, 고집과 편견은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정작 나가야 할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거룩하신 주님! 말씀에 대해서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시고 말씀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십시오. 아멘.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4)
좀 긴 예배를 머리에 떠올려 보세요. 우리가 익숙해 있고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더 긴
예배 순서입니다. 입례송을 부르고 찬송 후에 기도를 합니다. 이제 기도가 끝나면 찬양대의 찬양과 설교 순서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딴 생각이 납니다. 아니, 딴 생각이 아니라 드린 기도의 내용 때문에 기도가 이어지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그 기도를 드리면서 ‘ 나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아니, 정작 용서를 구하는데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외면했던 사람이나 일이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정작 용서받을 사람은 나 자신인데도
말입니다.그러면 즉시 기도를 중단하고 그 사람을 찾아갑니다. 직접 찾아가기 힘들면 전화를 걸어도 좋습니다. 전화상의 목소리로도 대하기가
겸연쩍다면 문자 메시지도 좋습니다. ‘나 지금 기도드리고 있는 중인데 그때 너와 다투고 화해하지 못한 것 미안해. 용서해 줄래?
사랑해.’
그리고 나서 나머지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시간이 5분 정도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기도와 기도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행한 이 선행이 앞뒤의 기도를 완성할 것입니다. 찬양대의 찬양이 은혜롭게 들리고, 말씀에 ‘아멘’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악의가
있는 감정을 마음에 품은 채 예배드리지 마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주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상처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회에 등을 돌리고 노골적인 반대자와 핍박자로 나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히틀러는 어릴 적 그의 어머니가 한 유대인에게 받았던 상처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끄럼을 잘 타는 소심한 성격의
어린아이였지만, 그의 어머니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유대인에게 억울한 핍박을 당하자 큰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후일 독일의 절대적 통치자가
되었을 때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해서 난폭하고 광적인 핍박자가 되었습니다. 6백만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살인마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과 다툰 사람이 당신의 고발자가 되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 용서해야 할 사람을 가슴에 품은 채로 기도드리지 않도록, 저희에게 화해의 영을
주소서.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게 해 주십시오. 아멘.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서울 대학의 박 모 교수가 삼만 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한 결과 73%이상 되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정직해서는 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투명하지 못한 세상에서 나 혼자 정직해서는 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정직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짓말하시지 않았습니다. 말을 부풀리거나 진실을 왜곡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고난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처럼 정직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정직한 자에게 복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까, 진실을 말하지 말아야 할까를 고민한다면 꼭 이 질문을 하십시오. “거짓말하는 나에게 하나님이 복 주실까? 거짓말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정직하지 못한 나의 계획에 복 주실까?”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실패가 되게 하시고 오늘의 안전이 내일의 벼랑 끝이 되게 하시는 일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하나님은 거짓에 복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받아도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진실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증인들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해야 될 우리가 정직을 의심받는다면 우리가 전하는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통해 구원받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투명하지 못한데 어떻게 세상 사람이 주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어느 분의 말입니다.
“당신은 진실을 말하십니까? 항상 그렇게 하십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내일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오늘의 물결이
내일의 파도를 이루고 명년의 홍수를 이룹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되십시오. 예수님처럼 진실을 말하고 오직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중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였습니다. 어느
해 몹시도 가물었습니다. 그는 양수기로 물을 퍼서 자기 논에 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논에 가 보니 물이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웃 논의 임자가 자기 논으로 물을 빼내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몹시 화가 났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참았습니다. 그는 다시 논에 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논에 나가 보니, 또 물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웃 논의 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항의했습니다. 물론 이웃 논 임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웃 논 임자에게 사과를 받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워치만 니의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틀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이웃 사람의 사과도 받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도
받았는데 그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일의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 꼭 정당한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느냐?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양수기를 준비해서 이웃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여러 시간
동안 이웃 논에 물을 충분하게 채워 주었습니다. 그 뒤에 자기 논에도 물을 채웠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웃 논임자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웃 논임자와 그의 온 가족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악으로는 악을 이기지 못합니다.
선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빼앗기면서 살지 말고 주면서 삽시다. 억울하게 당하면서 살지 말고 기쁘게 친절을 베풀면서 삽시다. 인색하게
살지 말고 너그럽게 살아가십시다. 그래야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 너그러운 마음을 주셔서 우리 이웃에게 늘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두들겨 맞아서, 거반 죽게 된 채로 길바닥에 버려졌습니다.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또 잠시 뒤에는 레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두
사람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동족이 강도를 만나서 죽어 가는데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주된 이유는 깊은 산중이라 아무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똑같은 유대인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고 주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면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를 피해서 지나갔겠습니까? 아마도 서로 먼저
돕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에 회당과 성전의 구석진 곳에는 작은 방이 있었습니다. 구제를 위해서
마련된 곳으로, ‘침묵자의 방’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그 방은 입구가 양쪽에 있었습니다. 구제하기 위해 들어오는 입구와 구제 받기 위해
들어오는 입구가 서로 달랐습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제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은밀히 구제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곳에서 얼마든지 은밀하게 구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당과 거리로 나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서 더 많은 영광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이유는 자기만족과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선행을 하고 나서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것, 즉 영적 교만이야말로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좋은 일을 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선행에 대한 동기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은밀하게 하는 구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신다는 말씀, 얼마나 감사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착한 일을 하면 칭찬 받고 싶은 유혹이 정말 달콤하게 우리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유혹도 이겨낼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자랑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살게 하옵소서. 아멘.
1898년 6월 10일, 조선 정부는 ‘인전교사’(因傳敎事)라는 호조(護照)를 발행한다.
호조란 당시 개시(開市)한 곳 이외의 지역으로 외국 거주인이 여행할 때 휴대해야 했던 일종의 여행권을 말한다. 따라서 ‘인전교사’라는 호조는
전도하는 일로 가도 좋다고 하는 선교 윤허의 첫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스왈런(W. L. Swallen) 선교사가 처음이었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가 입국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에서의 선교 윤허의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난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선교 실현의
원인을 되짚어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1895년 한국 교회 교세의 급격한 수적 증가를 주목하게 된다. 이때의 수적 증가는 당시 일어났던 을미사변과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일련의 역사적 상황에서 보여준 기독교의 충군 애국적 행동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회는, 민비 시해가 일제에 의해 외교 공관에서 음모되고 지휘된 사실을 폭로하고 이를 국제 여론에 공람시키면서, 일제에게 강력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민비와 같은 봉변을 피하게 하려고 계획되었던 춘생문 사건 그리고 아관파천의 드라마가 다 미국
선교사들과의 깊은 관련 속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전개된 반일의 태세에 선교사들이 순전히 정의감 때문에 동조하였고 마침내 한국과 선교사 곧
민족과 기독교와의 깊은 유기체적 일체감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교회에 조수처럼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을미사변에서 아관파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보여준 태도는 정교분리 고수라는 그들의 선교 방침에서 볼 때는 의아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라는 그들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반대하여 한국 민족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즉, 정교분리의 무심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기독교회는 바로 이러한 행동 때문에 민족의 가슴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기독교는 근대
한국에서 선교 자유를 우선 찾지 않았다. 살고 사랑해서 뭔가 남겨져, 그 선교 자유가 부여된 것이었다. 비숍 여사의 말처럼 “선교하는 이들의
따사하고 위엄있고 사랑에 넘치는 고귀한 영향이 하루의 매 시간 시간마다 감동으로 느껴져 남아,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은 보기에 좋은 세상이요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들어온 이후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엉키게 됩니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의 짐이 도도하게 인생들과 역사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간이 살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죄를 범한 인생들은 그 죄가 더욱 큰 죄를 잉태하여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죄악의 그늘이 빛을
몰아내고 정의를 짓밟고 역사를 억압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간의 가치와 권리와 존엄성을 파괴합니다. 이러한 혼돈에서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소유한 백성들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은 어둠을 몰아내신 것입니다. 어둠의 역사가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자들이 백성들을 억압하고
민중들을 수탈하며 악한 법과 질서를 만들어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을 노예로 부리고 짓밟았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생산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열등하고 미개하며 무식하고 야만적이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했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남성 중심의
관습으로 여성을 억압했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파헤치고 파괴하여 자연이 몸살을 앓고 신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들이 하나님을 기다리고 고대하며 아우성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는 빛이십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예수의 빛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생명이 살아나고 희망이 비취며 구원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들려지게 되고 병든 자가 일어났습니다. 힘없는 자들이 힘을 얻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함
자체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권리를 회복시켜 나가는 자정 능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나타내시는 은혜와
진리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되심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제 그 영광을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나타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 1:19)
세례 요한은 통찰력 있는 예언자로 새로운 음성과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그에 대하여 연구하고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나?”고 질문을 던질 만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터라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이 나타난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 누가복음은 더 자세한 자료를 주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 왕 헤롯 시대에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되고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였습니다. 주의 손이 그와
함께하였고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공식적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빈들에 있게 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고 그는 유대 광야 요단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리들은 정한 세 외에는 더 세금을 받지 말라. 군병들은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백성들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가 하여 찾아오고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온전한 말씀을 선포하며 강직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에 능력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는 현실에서
세례 요한의 행동과 설교는 배울 바가 크고 그 의미가 심히 깊습니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충실하고 바르게 산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빛을 발할
것이고 교회는 교회다워질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는 이 말은 충성되고 강직하며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사는 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네가
누구냐 !
빛이요 소금으로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시대를 변화시키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이사야 43: 1∼13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 1)
[묵상내용]
사람들은 자기 자녀와 자기 가족, 자기 집과 자기의 소유에 애착을 갖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남의 것에 손대는 것에는 그다지 관여를 하지 않지만, 나의 것에 남이 손대거나 하면 가만히 있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여호와께도 이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귀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능력의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봅시다. 그러면 오늘의 말씀이 바로 나 자신에게 하신 말씀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절)”고 하십니다. 우리가 전에는 마귀의 소유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하거나 괴롭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종종 우리를 두려움에 빠뜨려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하고 무능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드는 전략을 씁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육을 따르는 생활을 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롬 7: 25). 그러나 우리 앞에 어떤 두려운 환경이나 상황이 놓여있다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보호자요 인도자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때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감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함께하시고 돌보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항상 승리하게 하여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