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3)
오늘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송두리째 빼앗겼던 나라와 민족을 다시 찾겠다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삼일절입니다. 삼일운동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전환점이 된 민족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국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등불이 되어 백성의 사표로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는 많은 교회와 일천만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은커녕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겸손한 세리를 대조시키셨습니다. 이 죄인은 감히 머리를 들지도 성전
가까이 가지도 못하며 가슴을 치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따로 서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신앙의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도
잘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도 하고, 윤리ㆍ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믿는 자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문제가 될까요. 그는 교만했습니다. 자기 잘못과 부족함과 회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공로만 나열합니다. 또한 남을 정죄했습니다. 이웃의
아픔과 사정에 대한 이해와 사랑과 용서가 전혀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를 이용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과 율법주의,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삶의 모습 때문입니다. 희생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용도 없습니다. 이해와 용서도 없습니다.
본문의 세리처럼 겸손과 희생과 참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빛이요 소금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다시금 존경받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 삼일절에 즈음하여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새롭게 태어나 민족과 겨레 그리고 세계에 큰 빛을 비춰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성령이여, 도와 주시옵소서. 나라와 겨레 위에 임하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옵소서. 아멘.
어느 날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질문했습니다. “네가
누구냐?” 세례 요한은,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야의 길을 닦는 사람이라 말하면서, 진짜 메시야가 오시는데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려 속죄를 받는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희생하시고 헌신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씻어 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과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메시야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면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케 하셔서 죄된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령은 이 귀한 일에
동참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 임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예수님은 이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변화체험을 통해 어두움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 아래 있어 어두움에 속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예수님처럼 어린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어린양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의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성령으로 세례 받아 거듭난 삶,
변화된 천국시민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빛의 사명, 곧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어린양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희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우리들도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자기의 두 제자를 소개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안드레요 또 한 사람은
그 형제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자기들의 스승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했더니 제자들은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 질문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구하려고 예수를 믿습니까? 대개 세상 사람들은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을 구하는 것이 상례가 아닙니까?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보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확고부동하게 하신 후 제자로 받아들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소망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구원에 대한 순종 요청에 즉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하였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우리가 그렇게 찾았던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하며 좋아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서면 즉시로 이 소식을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가장 귀하고 바쁜
일이 바로 이웃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안드레처럼 우리도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그 이름이 수천 년 동안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실
때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부탁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산다면 멸망의 자리로 떨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만이 살 길입니다. 모두가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의 소망을 안겨 줍시다.
저희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소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이웃에게 증거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49)
‘나 따르라” 하신 예수님 말씀에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처음에 나다나엘은 빌립의 증거를 거부하였습니다. 창조와 생명과 구원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나다나엘은 달라졌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달라졌을까요?
첫째, 예수님의
거룩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성취를 소망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나다나엘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라 했더니 그 예수님의 거룩함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 중에는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명예, 출세를 위해 거짓말하고 남을 해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룩한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탐심으로 더러워진 사람은 마지막엔 비극으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롯의 아내는 재물을 탐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탐심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성결한 삶을 살 때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고 또 이웃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깊은 통찰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마음을 완전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까지도 꿰뚫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평소 생활 태도를 눈여겨보시고 그의 성실성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밉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합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두운 쪽을 보면 불평뿐이지만 밝은 쪽을
보면 감사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각도 잡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풍파가 있고 근심걱정거리가 있다 해도 믿음의 각도에서 보십시다.
나다니엘과 같이 놀라운 변화가 올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라고 고백하였고 예수님은 그에게 옛날 야곱 이상으로
큰 영적 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평소 이웃에게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관심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조선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당시 국내외의 혼란도 있고 하여 대개 두 가지 형태의 신앙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신앙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구국의 동기였다. 때에 따라 두 가지 동기는 서로 변주를 이루며 나타나기도 하였다.
“아국 교육을 도와주며 인민이 기상을 회복한 세력은 예수교밖에 없다”는 윤치호(尹致昊)의 고백은 그 단편을 이룬다.
처음 한국
교회의 신앙은 어땠을까? 1894년 예수성교서회 간행의 『찬양가』와 1895년 감리교 발행의 『찬미가』에 동시에 실린 찬송이 있다. 작자 미상의
여인의 것으로만 밝혀진 이 찬송은 장로교와 감리교 양교에 불려진 곡으로 당시 교인들의 신앙적 동질성을 어느 정도 밝혀 준다. “예수의 높은
이름이 내 귀에 들어온 후로 전 죄악을 소멸하니 사후천당 내 것일세/ 사람 육신 생긴 근본 생어토귀어토하네(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필주) 가련하다 천한 몸을 조금도 생각지 말세/ 귀한 영혼 예수 따라 천당에 곧 올라가세 거기가 내 본향일세 착한 영혼 모였구나/ 지성으로
믿던 덕이 좋은 줄을 깨닫겠네 여호와와 동락하니 무궁무진 즐겁도다.” 이러한 처음 교회 신앙을 감리교 선교사 존스는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곧 성서의 압도적 권위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앙, 예민한 죄의식과 회개, 개인의 인격적 신앙, 부흥회적인 열정, 교리문답식 성서 교육,
신앙인으로서의 헌신과 봉사, 십일조, 헌금, 강렬한 신앙 때문에 겪는 환난, 선교의 열정이 그것이다.
이렇게 내적, 종교적 차원의
신앙이 한국 초대 교회를 주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개화 지향의 외적 동기로 교회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
가령 최병헌(崔炳憲)의 생각이 그러했다. 그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여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종교와 정치는 서로 합하되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음에 쌓인 것이 일에 드러난다고 하였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는 실로 안팎에서 그리고 처음과 나중에서 국가의 명맥을
이룬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내적 신앙과 외적 신앙, 종교적 동기의 신앙과 개화 지향적 동기의 신앙, 이 사이를 정확하게 줄 긋기는 어렵다.
다만 이 양자의 건전한 접속을 시도한 일이 1907년에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의 모친을 동반하고 가나라는 동네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음료수가 바닥이 났습니다. 그 음료수는 포도주였습니다. 잔치 분위기가 흐려지고 주인은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난처한 주인의 입장을 안타깝게 여긴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날, 주님께서는 공생애에서 첫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적에는 언제나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첫 이적의 사건
속에는 더욱 큰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가나 혼인잔치의 이적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만든 포도주는 무한하지 않았습니다. 마시다 보니 부족했습니다.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족한 부분을 풍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시대에 사렙다 과부의 가정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덩이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신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이
이적은 유한한 사람은 겸손한 자세로 주님을 의지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삶에 지치고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굳센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빈 항아리와 같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라도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
이적에서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빈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것과
하객에게 그 물을 떠다 주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명령 다 순종하기 어려운 문제였지만 예수님의 모친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말했고, 종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며 살게 하옵소서.
아멘.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체로 어떤 현대식 건물을 지으려면 낡은 기존
건물을 파괴해 버려야 하는 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새로운 복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낡은 율법적 유대주의를 무너뜨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고난주간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는 자의 소와 양을
내쫓으시고 환전하는 자의 돈을 쏟으시며,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향해 비둘기는 가지고 나가라고 하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잠시 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참 성전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시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삼일 후의 부활 사건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영적인 성전이 우리에게 지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희생의 제물로 하는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율법의 창시자인 모세보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은총을 통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양이나 소나 비둘기 등의 제물이 필요 없는 예배, 십자가를 통해 드려지는 참 예배의 도래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낡고 형식적인
예배제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즉, 예배의 복음적인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의 희생이 아닌 어린양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희생으로 새로운 성전을 세워 주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면서 끊임없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신령과 진리로 주님께 나아가 항상
예배하게 하옵소서. 아멘.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유월절에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거듭나는 진리에 대하여 물었고,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써만 가능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과연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중생이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에게 구원 받았느냐고 물으면 “확실히 모르겠는데요,” 라고
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혼한 여인에게 “당신 결혼했습니까?” 라고 물으면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 분명히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한 해와 날은 잊었지만 결혼은 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결혼한 남편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적으로 주님과 결혼하는 이치와 같고 항상 신랑되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중생한 자는 이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의 변화된 체험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면 삶의 변화가 생기고 미혼 때의 생활에서 떠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은 구원받기 이전의 생활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과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변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거듭났다고 할 것입니다. 그의 삶의 변화 때문에
결혼했다고 확신하듯이 주님과 결혼한 기독교인은 변해야 합니다.
셋째, 자식이라는 태의 열매가 있기에 결혼에 대해 확신합니다. 참
신자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안다고 하였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전도의 열매, 입의 열매인 좋은 말씨, 기도의 열매, 찬양의 아름다운 열매 등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율법을 지킴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씻는 표인
세례를 받고 성령을 구하며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결혼 기념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 자체가 더욱 중요하듯 거듭난 날짜보다도 거듭난 것을 더 중하게 여기면서 확신 속에서
살아갑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진리가 본문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 등의 낱말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요 진리의 골격을 구성하고 있는 개념들입니다.
기독교는
이 한 절의 말씀만 있어도 인간의 구원 사역에 손색이 없다고 할 만큼, 이 말씀은 기독교 진리의 요소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나 당연히 치러야 할 빚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에게 그분을 사랑하도록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행하심으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전혀 그러실 필요가 없으셨음에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특별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습니다. 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 멸망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피조물에게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까지 내놓으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냥 넘어갔거나
수그러들었거나 진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중지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그 자신의 심판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마다 그의 죄가 십자가
상에서 용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조건이나 협상이 아니고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합니다. 나의 삶 가운데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항상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
3:26-27)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의 지방에 가셔서 세례를 베푸실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일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로 간다고 한탄했으며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겸손하게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렇게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듣지도, 신뢰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요한은 이 사실에 대하여
기이히 여길 뿐 아니라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요한은 선택된 남은 자의 신앙에로 눈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33절).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 보증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우리는 그 진리에 기꺼이 동참하여 존귀와 영광를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모두 ‘예’와 ‘아멘’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관해 하신 모든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약속에 신실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을 우리가 깨닫고 더욱
기꺼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27절)고
했습니다. 자신의 쇠함도 그리스도의 흥함도 내 할 바를 다한 후의 결과이면 하나님의 섭리로 순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천륜과 인륜마저 뒤집으려 하는 풍조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큰 사람의 인생관입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28절)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절대자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존재다. 나는 다만 진리의 종일 뿐이다’라는 세례 요한의
신앙은 우리 성도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참된 신앙 철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녀가 되게 하소서. 불평과 원망을 버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와 같은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고, 사람이 만든 실패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수’, 곧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삶에 지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영생을 선물하실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여인은 생수로 비유하신 주님의
영생의 제안을 깨닫지 못하고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결국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의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인생들의 한계 상황과 그와 같은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어쩌면 죄악된 세상의
옛 우물가에서 삶의 의미와 희망에 대해 끝없이 목말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그 옛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의 랍비들은 ‘율법의 지혜’를
생수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으로는 양심의 만족을 누릴 수가 없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히 10:1-4). 또 사람들은 세상의 희망과
행복을 ‘삶의 샘터’로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 행복은 바닷물과 같아 마실수록 갈증을 더할 뿐입니다. 우리는 정상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험난한 계곡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의지하는 그분,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십니다.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자들은
진리와 생명의 성령께로부터 끝없이 사랑을 공급받는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을 샘물처럼 이웃에게 나눠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랑을 나눠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칠지라도 내게 생수를 먹여 주시고 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오늘도
그 생수로 하루를 기뻐하며 살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한국 교회의 신앙은 지역적 전개의 특성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대개 서북과 비서북의 양대
지역 교회의 구도로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서북 지역 교회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서북 장로교회를 말하며, 비서북 지역 교회는 장로교회를 제외한
서북의 모든 교파교회와 나머지 지역의 교회를 일컫는다. 다만 경상북도의 장로교회는 그 신앙의 골격이 서북 지역 교회와 같았음을 명기해
둔다.
한국 교회 신앙 지형의 역사는 멀게는 ‘지역 예양’(Comity Arrangement)의 사건으로 소급된다. 이것은
1893년 조직된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의 업적으로서 일종의 선교지역 분할 정책이다. 선교 기관이 여럿이기 때문에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 없는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 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및 경상북도를 분할하여 맡게 된다. 이 지역 예양의 합의는 신앙과 교리의 경계선을 관통한다. 1892년 북장로교와
북감리교는 원칙적으로 5천명이 넘는 읍 이상의 지역에서는 두 교파가 함께 선교하지만 그 이하의 지역에서는 기득권을 피차 인정한다는 지역 분할의
합의를 이루었던 것이다. 연합적 분할이라는 이 선의의 프로그램이 뜻밖에도 훗날 한국 교회의 지역적 대립 구도와 얽힌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한국 교회 신앙의 지역적 전개는 서북 지역 교회의 압도적 교세로 인해 그 양대 구도를 형성해 간 흔적이 뚜렷하다.
이곳 교회의 교세는 선교 초기부터 1945년 해방까지 내내 일제하 한국 교회 교세의 80%를 줄곧 넘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서북 지역 교회의
중심 도시는 평양으로서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막강한 교세를 배경으로 한국 교회 교권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이 비서북 지역 교회의 중심 도시로 부각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서울은 당시의 행정
수도였다. 선교사들의 노고가 처음부터 이곳에 집중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평양이 수도 서울을 제치고 한국 교회의 중심지로 부각되었을 때,
서울은 자연 평양 교권에 도전하는 중심 지역으로서 자처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하 한국 교회 역사에서 실재가 되어
나타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요 4:34)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누구를 만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더구나 다섯 번의 결혼 실패로 그녀의 인생은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얼마든지 그냥 지나쳤을 보통 이하의 여인입니다. 너무나
눈물겹게 살아왔던 그녀였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벗어던지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다가 “네가 그토록 찾던 메시아, 그가 바로 나다!” 하시자 그녀의 마음이 열리고 귀가 뜨였습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여인은 이제
대낮에 사람들에게 외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사람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롬 1:1).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배설물로 여길 만큼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빌 3:7-11).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간 것처럼 바울은 무명의 유대인으로 로마의 심장부를 향해 달려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라고 외쳤습니다.
여인의 변화는 사마리아 동네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 사건을 놓고 한 가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
양식이 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양식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수단인 것처럼,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주님의 유일한 양식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전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지금이야말로 무르익은 곡식을 추수할 때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 여인처럼 무엇엔가 갈급하여 있는 준비된 영혼을 수없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 익은 곡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예수 믿으시오. 와서 보시오”하며 내가 만난 예수를 담대히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녀였을까요? 왜 바울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제자로 불러주시는 걸까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주님, 연약한 자들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우리 인생에 닫혔던 문을 열어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이웃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 4:50)
오늘 말씀은 왕의 신하의 아들이 고침 받는 일화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아들의
치료를 위해 그는 지위와 돈을 가지고 백방으로 힘써 왔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34Km나
떨어진 가나로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예수님만큼은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자, 주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하고 좀 못마땅한 대답을 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왕의
신하에게만이 아니라 단지 기적만을 쫓아다니는 모든 무리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전에 수가성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단순히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진 것과는 달리, 지금 갈릴리 가나 사람들은 오직 기적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절박한 요청에,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새로운 위기가 될 만한 시험을 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그는 주님께서 가나에서 하셨다면 지금 여기서도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데 있었음을 비추어 볼 때, 주님의 석연치 않은 반응은 사람들의 부적절한 믿음을 바르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에 관한 사람들의 피상적인 지식과 편견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신’(롬 1:16) 예수님을 믿는 데
걸림돌이 되었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동반합니다. 신비한 믿음의 세계는 갈급함 속에서 순종하는 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버린 간절한 믿음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인간이 되어서 돌아온 게 아닙니다.
배고파 견딜 수 없어서 돌아왔습니다. 이를 놓고 어거스틴은 “탕자는 조금 배고플 때는 쥐엄 열매를 찾았다. 그러나 정말 배고프게 되자 아버지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애절한 마음은 온전하지 못한 믿음을 성숙시키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고난은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주, 성공과 번영이 아닌 실패와 고통을 통해서 큰 복을 예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라” 하시는 말씀을 따라
믿음을 가지고 문제의 현장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하나님, 오늘도 내 문제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리는 믿음을 주옵소서.
아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하자, 하나님과 아들이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이를 문제 삼아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다 보셨고
자기는 본 그대로 지금 일하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아버지가 저 하늘 위에서 하신 일들을 그대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자녀를 보면 걷는 모습이나 말투가 부모를 닮습니다. 아들은 모든 것을 아버지가 하는 그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일도 큰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권세를 주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자가 되시고, 온 세상의 심판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믿는 자는 ‘현재’에 이미 ‘영생’을 얻었으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골 1:13, 롬 8:2).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멸망은 벌써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고, 마지막 날 주님이 오실 때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국으로 향하는 감격만 있게 될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한결같이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영생의 복을 누리는 자답게 찬송하며 삽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영생의 복을 누리며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결국엔 순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 가운데서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28) 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담대했습니다(행 7:54-60).
우리 가운데 이런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항상 평안을 누리고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을 자신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마지막 날에는 자기 운명을 자신이 바꾸지
못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선택하고 결정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음은 물러가고 당장 영생이 축복으로 임합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살게 하옵소서. 아멘.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렘 4:19)
하나님 앞에서 정말 눈물을 많이 흘렸던 사람, 곧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탄식과 눈물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20세를 전후한 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시야는 애굽과의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여호야긴, 시드기야 같은 당시 왕들도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면서 예레미야를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예레미야가 경고하고 예언한 대로 유다는 멸망의 길로 달려갑니다. 유다는 주전 584년에 바벨론의 3차 침공으로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왜 울어야만 했는지 그 안타까운 마음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울었습니까? 그가 전쟁의 경보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그는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영적으로 깨어 있었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가
외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했던 유다는 결국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나와 내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삼가고 눈물로 회개하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는 자나 그의 민족은 주님의 긍휼과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성경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책인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사건과 증거가 있었고 오늘날도 매 주일마다 전 세계 약 10억 이상의 인구가 성경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통해 성경의 중요성을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영생의 도리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본문 39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려고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듣거나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우주에서 영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 우주에서 영생 하나를 얻으면 실상은
모든 것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고백하기를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다윗도 시편 23편에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생이 인간의 소원이나 노력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세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성경을 읽고 듣고
상고하여,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성경은 각종
기적이 수록된 신비한 책만이 아니고 시와 잠언이 기록된 지혜문서만이 아니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계시의 책이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구원과 생명의
책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성경을 가까이 하여 영원히 살 길로 가야 합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8)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 중 하나는 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를 따라 일하는
분이셨습니다.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30세가 되도록 조용히 계셨습니다. 30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아무렇게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는 아직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실 때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때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전도서 3장에 있는 말씀대로 천하만사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아는 것은
그냥 적당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주님의 때를 이루어 드리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짓습니다. 그것은 며칠이나 몇 달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노아는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설계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가 방주를 다 지은 때에 홍수 심판을 시작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제자들을 만나지 않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기도로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보내시고 또한 살게 하신 것은 이 시대를 위한 우리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주어진 때에
착하고 충성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 때를 기다리며, 그 일을 준비하며, 기도로 우리 자신을 준비합시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 신앙의 지역적 전개는 그에 대한 조정의 차별적인 대응 양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즉 해서(海西)와 관동(關東) 지역에서의 기독교 신앙과 전라도 진산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조선조의 대응양상이 각각
달랐던 것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조선 인조(仁祖) 이후 싹을 내기 시작하여 영조(英祖) 때에는 해서와
관동의 민간인 사이에 상당히 넓게 보급되고 있었다. 제사를 폐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그때 조정에서는 그것을 일반 백성의 무지한 소치로
보고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조 때에 와서도 해서지방에 사학(邪學)이 퍼져 집집마다 사당을 부수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였던 일들을
비탄하고 그 세력이 해서지방으로부터 관동지방에 이르렀음을 고발하는 상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학(正學)이 바로 서면 사학(邪學)은 스스로
자멸하리라고 보아 그 현상을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 당시 조정의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 정조 신해년(辛亥年)에 와서 전라도 진산의 유학자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기독교 신앙을 묵수한다고 하여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때 조정의 대응 양상은
전혀 달랐다. 이들이 나라의 양식을 깨치고 백성을 미혹한다고 해서 참형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1791년의 신해교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톨릭교회 신앙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 양상은 그 신앙의 지역적 소재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해서와 관동
지역이 조선조에서 가졌던 무게는 전라도 진산의 그것과는 전연 달랐기 때문이다. 전자는 말하자면 정치적인 오지와 지리적인 오지였다. 그러나 후자는
나라의 제도나 정치 및 정학(正學)의 중추를 지켜 나갔던 사대부들의 집성지였다. 두 지역 다 제사를 폐하는 일이었으나 그 사회적 반향이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조에서 양 지역이 가지는 실체적 의미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나라의 중추를 지켜 가던
사대부들이 가톨릭 신앙을 이유로 해서 폐사의 일로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조선조의 체제와 정통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조선조의 박해와 가톨릭교회인의 순교는 피할 수 없었다.
어떤 부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에게
50만 원씩 주면서 안방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구입해 오라고 했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방에 채울 건초더미를, 둘째
아들은 솜뭉치를 가져왔고, 셋째 아들은 길거리에서 불쌍한 사람에게 빵을 사주고 남은 돈으로 양초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부자가 셋째 아들에게
양초로 어떻게 방을 채울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양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방안은 빛으로 가득찼습니다. 아버지는 셋째 아들의
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에서, 그동안 살아온
삶의 경험에서, 위인들의 이야기에서, 그 외에 많은 영역에서 지혜를 찾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방법으로도 지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세상에서 찾는 지혜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것입니다. 시편 111편 10절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지혜를 찾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게서 지혜를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공경하면서 두려워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온전케 하는 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에게서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많은 사람을 교훈하셨고 사람들과
토론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만 사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의 지식으로 교훈하셨다면 온전하지 못했을 뿐더러 인류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보이고,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계획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신 광야에 이르는 기간은 약 한 달
정도였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양식이 바닥나자 백성들의 마음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기쁨이 사라지고,
축복의 땅으로 가는 소망이 흐려졌습니다. 애굽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잊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 생활을 그리워했습니다.
백성의 원망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만나’라는 양식을 매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살린
양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먹으면서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만나가 없었다면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에 싫증을 느끼고 땅에서 생산되는 음식을 먹길 원했다면 그들은 다른 곳에 정착했을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은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나는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꼭 필요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가나안 땅에 도달했듯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들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만나와 비교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자신을 만나와 비교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 없이는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없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이 세상에서 꼭 누려야 하는
하늘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생명나무 열매를 통해 주셨던 복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족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어떤 어둠도 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두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세상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신 것입니다. 세상을 어둠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가 오시지 않아도 이미 빛으로 창조된 세계인데, 어째서 다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악한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은 온갖 범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래 빛으로 창조된 세상이기 때문에 빛을 받지 않으면,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이 병들고 시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세상 어둠의 세력들을 꺾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병들고 시든 수많은 영혼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만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셔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이 빛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맺어지는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거하면 어떤 어둠의 세력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악의 권세에게 승리하신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비춰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생명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 땅 모든 생명체에 빛으로 임하여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살다보면 질병, 가난, 슬픔, 죽음 등 우리를 얽매어 힘들게 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만나게 되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해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죄의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본문 21절에서도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롬 3:23, 롬 5:12).
그렇다면 누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본문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면 죄 가운데서 죽지 않으리라는 말씀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참선과 선행, 종교적 행위를 통해 이러한 노력을 해 왔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신부전증에 걸린 환자가 혈액 투석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시적으로는 깨끗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해결하지 않았기에 혈액은 다시금 독소로 가득하게 됩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신장이식을 받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장이 혈액 속에 있는 더러움을 걸러 주게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본문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얽매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본문 32절 말씀은 “예수를 알지니
예수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고 그분만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리되신 주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날마다 진리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 8:47)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특별히 가정 환경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환경이 사람의 정체성과 인격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이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돌프 히틀러와 챨리 채플린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비슷하게
불우한 환경이었지만,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공포에 빠지게 한 인물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웃게 만든 인물이 된 것입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이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결단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부모님의 좋은
신앙을 통해 자녀도 역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자녀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자신들은 죄의 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조상이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나 자신이 죄를 범하였다면 죄의 종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적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죄를 범하게 되면 영적으로는 마귀의 자식이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자신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구원받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말씀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신앙 좋은 사람이 있음을 안심하지 마시고 나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다시 돌아봄으로 영적 재점검의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고등 수학을 설명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철학과 문학을 이야기하면
소화해내기가 어렵습니다. 이해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3차원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면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교만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빙산의 일각, 즉 수면 위에
나와 있는 작은 부분(10%)을 눈으로 보면서 그것이 빙산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면 아래에는 더
많은 부분(90%)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교만과 몰이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육신적인 가치, 땅의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에 영원한 가치, 하늘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조롱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주제 중 하나는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아브라함도, 또한 위대한 선지자들도 다 죽었는데
예수님의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자신들의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판단 기준은 내 경험과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능력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확증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다른 곳이 아닌 골고다, 즉 해골이라
불리는 언덕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해골은 죽음, 사망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골고다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예수님의 생명의 피가 흘러내려 그곳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의 피가 흐르기에 죽음을 이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0:25-26)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그 사랑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아멘.
세계 기독교회에는 크게 세 개의 가족이 있다. 동방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고
개신교회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하나의 기독교회가 동방과 서방의 교회로 분리된 것이 1054년의 일이고,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회가 갈라져
나온 것이 1517년 종교개혁 때의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회의 역사라고 할 때는 이 세 교회의 역사를 총칭한다. 한국 기독교회의 경우, 그
역사의 처음은 가톨릭교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100년 이후 다양한 교파의 개신교회가 전래된다. 가난 때문에 멀리 시베리아로 이민 간 숱한
조선인들이 러시아의 동방정교회에 입교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한국에 가톨릭교회가 전개되기 전 한국과 기독교의 접촉을 시사하는 사례가
몇 있다. 당을 통하여 접촉된 경교(景敎), 몽고를 통하여 접촉된 가톨릭교회 그리고 일본을 통하여 접촉된 기독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사건은 그 이후 시대와 어떤 역사적 연계성도 갖지 못하는 일종의 낭만적 사건들이다. 그 가운데 일본에서 순교한 조선인 포로들의 이야기가
전문된다. 1592년 발발한 왜란의 와중에서 일본에 노예로 잡혀간 수많은 조선인들은 군비 조달의 방편으로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려가는 참상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노예 매매의 문제를 두고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상인들과 선교사들 사이에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같은 포르투갈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교사들은 이러한 비인도적 만행을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일본인 다이묘들을 설득해서 그런 만행을 가능하게 하는 노예 전출을 삼가게
하고, 또 노예 매매의 반복을 금해줄 것을 종용하는 한편 할 수 있는 대로 손을 써서 노예구출을 모색한다. 그리고 이 노예들에게 조선어로 번역된
교리서들을 가르쳐서 복음의 길로 인도하려 힘을 다한다.
나라 밖에서 육체의 부자유와 극단의 공포를 품은 채 기독교에 인도된 이들
조선인들은 그들이 맛본 구원의 메시지 때문에 순교에까지 이르게 된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엄격한 기독교 박멸
정책을 쓸 때 이들 조선 포로 신도들은 이국 하늘 아래 장엄한 순교의 향기를 널리 퍼뜨렸던 것이다. 1867년 7월 2일 로마 교황 비오 9세가
시복(諡福)한 일본인 순교 복자 205인 중 9명은 이들 조선인 포로 신도들이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재상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이 재상에게
보석을 뇌물로 주려고 하자 재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보석보다 더 귀한 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싼 보석을 보고도 탐낼 줄
모르는 내 마음입니다. 만약 내가 이 보석을 받으면 당신도 보석을 잃게 되고, 나도 내 마음의 보석을 잃게 되니 도로 가져가십시오.” 온갖
부정과 비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쉽게 넘어지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귀중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종교적인 누룩으로서 외식주의입니다. 헤롯의 누룩이란 정치적인
누룩으로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추악한 행동입니다. 종교는 독선과 위선과 형식주의로 세상을 병들게 만들고, 정치는 음모와 술수와 거짓으로
세상을 병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헤롯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으나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막 3:6). 진리는
끊임없이 거짓과 불의의 공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누룩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의 탈을 쓴 채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모든 은사를 혼자 독점한 것처럼 경건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자기 신앙생활을 기준으로 쉽게 남을 정죄해 버립니다. 신앙경력과 직분 우월감에 매인 계급의식으로 교회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불의한 세력을 향해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줍니다. 정욕으로 온갖 범죄를 저질러서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오늘의 누룩들입니다. 누룩은 소리 없이 끈질기게 우리 속에 침투하여 부패하게 만듭니다. 독버섯처럼 교회와 사회 전반에 펴져 있는 악한
누룩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된 세상 교훈과 가치관과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사랑과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이 우리가 가져야 할 소중한
보석입니다.
누룩과 독버섯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하시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마음의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희 안에도 악한 누룩이 있습니다. 잘못된 교훈과 가치관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의롭고 진실하게 살게 하옵소서. 아멘.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요 6:19-20)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고 광풍이
불었습니다. 성난 파도 앞에서 두려워하며 노를 젓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풍랑이 심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이 두려워하자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매일 놀라운 기적을 보았지만 여전히 주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보다 그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을 굳게 믿고, 내 삶을 드리고 모든 문제를 다 맡겨야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던 사람이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태워
드렸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뒷좌석의 할머니가 여전히 머리에 짐을 이고 있었습니다. 그 운전사가 “할머니, 왜 짐을 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할머니는 “아이고 선생님, 내 몸 하나 태워 준 것도 고마운데,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나요?” 라고 말하더랍니다.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도
종종 “아이고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어떻게 저의 문제들까지 주님께 다 맡깁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은혜롭게
예배를 드린 후에 세상에 나가서는 여전히 무거운 짐들을 진 채 “아이고, 나 죽겠네”하면서 근심과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죄악의 짐, 질병의 짐, 생활의 짐, 마음의 상처를 대신 담당해 주십니다.
이런 짐들을 나 혼자 지고 근심과 두려움으로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려 365번
나옵니다. 이것은 일년 365일 매일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항상 풍랑이 일렁이는 인생 항해에서 온갖 삶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와 두려움을 이기며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짐을 대신 지신 주님,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항상 주님만을 굳게 믿고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애벌레에게는 길 위에 놓여진 것들은 돌멩이, 냇가, 막대기 하나도
다 문제가 되지만 나비에게는 모든 것이 다 구경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애벌레는 점점 변하여 나비가 되지요.”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이 애벌레
수준이라면 땅위의 것들에 매여 버거운 삶을 살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 수준이 되면 그는 모든 것을 극복하는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땅위의 것들에 매여서 고통스럽게 살아갑니까?
오병이어 기적을 본 후 떡에만 관심을 둔
무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을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비록 땅 위에 내려진 것이었지만, 이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의 생명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단순히 육신의 떡을 주신 분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의 본체로 믿어야 합니다. 이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써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과 생명이기 때문에, 말씀이신 예수님을 알아야만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떡은 돈과 돈 같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살 것 같지만 오히려 살 수 없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호화로운 집은 살 수
있어도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어도 행복한 단잠은 살 수 없습니다.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식욕은 살 수 없습니다.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습니다. 책은 살 수 있어도 지혜는 살 수 없습니다. 약은 살 수 있어도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쾌락은
살 수 있으나 참된 기쁨은 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생명은 물질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믿음
안에서만 누릴 수 있으며, 참된 행복은 물질보다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서 존재합니다.세상의 떡이 아니라 하늘의 떡을, 썩어질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그 영혼에 품은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 6:51 )
예수님은 떡(물질)을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일에 방해되거나
혼란케 하는 것에 대하여는 종교적인 전통조차도 거부하고 거절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에 대하여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내 마음대로 신앙생활하던 옛 습관을 고침받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자신이 진정한 생명의 떡임을 드러내셨으나 무리들은 단지 먹고서 포만감을 느꼈던
떡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욱 더 분명하게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참 떡, 곧 생명의 떡이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게 됨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과 기대에 어긋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은 결코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기준으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이즈로, 하나님의 스케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가치관으로 판단하면 믿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무관하게 자신에게로 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자만이 예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께로 올 수 있고 구원에 참예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하십시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믿어질
수 있습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살찌우기 위해 예수님을 기꺼이 보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탄이 주는 돌떡을 먹고 체하였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보내 주신 생명의 떡 예수님만으로
배부르게 하옵소서. 아멘.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고난주간 없는 부활주간은 없습니다. 고난주간을 믿음으로 보내야
부활주간도 믿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만이 기쁜 소식(복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지닐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온전한 복음입니다. 즉, ‘잘 살게 되었다’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적인 온전한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이미 영생을 지니게 되었으며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날에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들을 다시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곧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예수께서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 안에 친히 머물러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예수님과 특별히 친밀한 영적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곧 이 땅에서부터 천국생활을 보장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풍조와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욕정에 끌려다니며 도적질 당하고 영혼이 죽고 멸망당하는 것을 멈추는 것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을 누리는 것이고 예수님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세상의 풍조와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정욕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
신앙의 출발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 주시고 예수님이 보여 주시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말씀따라, 말씀처럼, 말씀대로 풍성케 되는 것이
신앙의 목적지입니다. 이 귀중한 고난주간에 예수님께 순종하지 못한 것도 회개해야 하지만, 불순종하여 풍성한 복을 빼앗겨 버리고 살아온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는 도적질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 당하는 것들을 받아 먹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부터는
주님이 주시는 떡과 잔을 믿음으로 받고 배부르게 먹게 하옵소서. 아멘.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단답식의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객관식으로 보기가 주어진 문제도
아닙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묻고 답해져 왔던 물음, 그것이 고난과 고통의 문제입니다.
욥기가 들려주는 고난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고난의 문제, 특별히‘선한 사람’과 ‘하나님 백성’에게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들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분명한 것은 고통에 대해서, 특히나 남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언약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버린 주전 587년의 비극은 언약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에게
적잖은 의아심을 품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파괴를 묵인하셨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왜 우리 교회에 이런 일이…’독일의 신학자인 도로테 죌레는 그의 저서
『고난』(suffering)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것이 누구를 섬기는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을 섬기는가, 악마를 섬기는가, 살아 있는 자가 되게 하는 원인인가, 도덕적으로 무력한 자가 되게 하는
원인인가?” 즉, 그는 ‘이 비극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묻기보다 ‘이 비극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보배로운 정금 같은 자리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져져 깨진 질항아리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린 시온의 아들들. 그들의 비극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고백은 이후 사도 바울의 입술을 빌려 이렇게 바뀝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본디
그들이나 우리나 정금같이 보배로운 까닭은 다만 보배되신 예수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가 보배로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고
그분을 모시지 못하면 다시금 던져진 질그릇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깨어 묵상할 일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희의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귀기울이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