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생명의 떡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밝히신 후 제자들 중 여럿은 수군거리며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걸림이 되는 근본 원인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 자체 보다는 그들의 교만함에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거두어 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종종
우리에게서도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자기 중심적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인정하고 말씀 앞에서 수군거리기보다는
아멘하며 순종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못 알아듣고 안 알아듣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영은 살리는 것이요 육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으로서의 ‘영’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육은 인간의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육’의
모든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육이 영, 즉 성령으로부터 분리되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영(하나님의 것)적 신앙인지 아니면 육(세상의 것)적 신앙인지 말입니다. 영이 육을 지배하고 있는지 육이 영을
지배하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들을 지켜보고 그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많은 이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내가
잘하고 과거에 잘하고 다른 사람보다 잘한 것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믿음이 남다른 체험과 남다른 헌신을 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남다른
체험을 하고 남다른 이적을 체험한 제자들도 흔들렸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정욕을 이기고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비결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세상보다 나보다 물질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 육적 신앙이었음을 마음을 찢으며
아파하는 거룩한 고난주간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1801년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은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교회의 형태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와 이를 치죄한 정순왕후의 토사교문(討邪敎文)의 내용은 가톨릭교회와 조선 조정 사이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황사영은 정약종의 사위로, 청국인 주문모 신부를 남달리 섬기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던 열렬한 신도였다.
본래 경상남도 창원 태생인 그는 신유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에 있는 배론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친구 황심(黃沁)과 모의하여 조선 교회를 교난의
위기에서 구한다는 일대 계략을 꾸민다. 길이 62cm, 폭 38cm의 흰 비단에 무려 1만 3천여 자로 적은 그의 비밀서한(황사영 백서)은
청국의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에게 밀송하기 전 발각되어 형언하기 어려운 처절한 박해를 전국적으로 불러온다. 이때 순교의 피를 흘린 교인의 수는
3백을 넘었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천주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곧 천주를 대신해서 징계와 벌을 줄 것이오. 죽어도 다시
돌아서지 않겠노라”는 표현까지 불사한다. 그의 표현은 격렬하였다. 그것은 성교(聖敎)에 대한 그의 열정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망하여
없어져도 성교의 표는 남아있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의 신앙은 순수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조의 사회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반역의 요소로 비춰지고 있었다. 신유의 옥사를 치른 정순왕후는 다시는 사교의 비리가 없도록 경고하는 토사교문을 작성해서
국내에 두루 공포한다. 이 교문은 서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나라를 원망하며 뜻을 상실한 무리들로서 신앙을 이유로 한 반역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다. 그리고 종교는 종사의 안녕에 반(反)하지 않는 한에서 정론이라는 입장을 천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의
유교와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교회가 둘 다 정교일치의 구조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교일치의 사회에서 정통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황사영의 울트라몬태니즘(Ultramontanism, 교황권지상주의)과 정순왕후의 시저로페이피즘(Caesaropapism,
황제교황주의)이 병존하는 일은 그래서 구조적으로도 불가능하였다. 유교와 가톨리시즘 중에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신앙의 양상은 결국 조선조의 박해와
가톨릭교도의 순교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 9:3)
어느 날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주님은 “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려 함이다” 하시면서 그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소경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 된 원인을, 그 죄를 자꾸 살펴 찾는 것입니까? 그래서 아픈 상처를
자꾸 덧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를 고쳐서 보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칼에는 두 개의 날이 있지만 사람의 입에는 백 개의 날이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남의 불행과 아픔 앞에서 특별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입단속 잘하라고 삼중의 울타리를
두셨습니다. 먼저 입술과 이가 그것입니다. 그것들이 이중으로 우리 혀를 지키는 파수꾼들입니다. 세 번째 울타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제9계명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혀를 잘 지키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말을 아름답게 하면 그는 얼마나 빛나는지요! 2002월드컵 때
우리나라와 미국의 시합에서 황선홍 선수가 쓰러지면서 페널티 킥을 얻어냈습니다. 이을용 선수가 찼습니다. 실축했습니다. 경기 후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에게 황 선수는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저라도 실패했을 거예요.” 서로 이해해 주고 격려해 주는 한마디가, 그런
분위기가 우리 축구팀을 월드컵 4강까지 끌어올린 것 아닐까요?
세계적인 기업 GE의 경영자 젝 웰치는 어린 시절에 말을
더듬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참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얘야, 네가 말을 더듬는 건 네가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야. 네 혀가 똑똑한 네
머리의 생각을 다 따라가지 못해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젝 웰치는 나이 45세에 세계적인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경영이론은 ‘속도, 간결성, 자신감’ 세 가지로 말해집니다. 그 ‘자신감’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 어머니의 격려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는 복된 말과 사랑의 행동을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사람들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 사람들을 돕고 격려함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리핑 인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형식적이고 과장된 보고서처럼 겉만 번지르하게
치장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유한 일종의 풍자입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겉치장에 큰 돈을 쓰고 있지만, 사실 문제는 겉이 아니라 속이요,
충실한 내면이라는 것을 따갑게 지적하는 말입니다. 몇 년 전 독일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총을 마구 난사해서 여러 사람이 죽고 다친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슨 마음일까요? 그 마음이, 영혼이 얼마나 거칠면 그렇게 마구 세상을 향해 무차별로 총을 쏴대는 것일까요?
미국에서도 몇 년 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총을 들고 마구 쏴대는 바람에 학생들은 물론이고, 조나단 레빈이라는
젊은 선생님도 희생되었습니다. 그는 백인이요, 언론 대재벌 타임워너사의 회장 아들이었음에도 부와 명성을 뒤로한 채, 자발적으로 흑인 빈민가의
학생들에게로 다가가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안타깝게도 철없는 제자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 사건 후 그가 재직하던 태프트 고교에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 사랑을 되새기기 위한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타임워너사의 회장이며 레빈 선생의 아버지인
제럴드 레빈 회장과 그 어머니 캐럴 여사를 눈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럴드 레빈 회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가 생전에 재직하던 이 학교에 거액을 기증하여 그의 이름으로 기금을 설립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머니 캐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조나단의 아이들이고 그래서 결국 나는 여러분의 할머니”라고 말입니다. 강당은 일시에 감동과 눈물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레빈 선생은 안타깝게
죽었으나 수많은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지워질 수 없는 큰 사랑의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취임 직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임기를 마칠 때, 사람들에게 내가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실패입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겸손히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서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시는 그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름답게 헌신하며 살면 그 자리가 축복의 자리요, 은혜의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고 승리하는 사람들 되기를 원합니다.
꽃처럼 활짝 피어나기를
•요한복음 10:1~18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면 봄꽃들이 화창하게 피어납니다. 봄비를 맞아 땅이 풀리고 따스한 기운이 돌면 나무들이 힘을 얻어 봄꽃들을 활짝 피워냅니다. 새봄입니다. 봄은 활동하는 계절입니다. 움직여야 변화가 있고, 움직여야 하나님이 힘을 더 주십니다.
‘전도 열심이 활짝 꽃피는 봄’이 되었으면 합니다. 꽃을 많이 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무를 잘 돌보고, 물을 잘 주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땅에 꽃씨를 뿌린다면, 씨앗을 널리 그리고 많이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소식, 구원 소식을 더 널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고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서울 서초경찰서에 이런 사람이 잡혔습니다. 이모씨 일당은 청담동 어느 병원에서 말기 췌장암 환자에게 접근한 후 무려 6억 원이나 받고 가짜약을 팔다가 덜미를 잡혔습니다. 이들이 팔았던 약에는 수은과 비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살리는 약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었더란 말입니다. 그 약을 먹은 환자는 2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가족들은 통곡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일에 용기를 내고 큰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전도는 참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값없이 받은 은혜와 구원을 이웃에게 나눠 주는 선행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주신 구원의 소식이 있습니다.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악인들도 그렇게 열심히 나쁜 일 하는데, 우리가 생명과 구원의 소식을 가지고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는다면 되겠습니까? 많이 뿌려야 합니다. 열심히 많이 뿌려야 많이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봄을 맞이합시다. 사랑과 열심으로 봄을 맞이하고, 기도로 언 땅을 녹여야 합니다. 승리하는 신앙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약점이 있어도, 부족하여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어서면, 예수님 소식을 행복하게 외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는 열심이 활짝 피는 봄이 우리 삶에도 시작되도록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습니다. 오랜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찾아오셔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예수님으로 말씀하셨다가 지금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 외에 하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즐겨 사용하시는 도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 즉 스포츠나 취미나 일들을 통해서 자주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엔 우리의 주변 환경이 너무나 시끄럽습니다. 또한
우리가 너무 빠르고 바쁘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하나님께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바쁘게 음식을 준비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자기 일을 도와 주지 않고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못마땅했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보통 마르다는
일을 우선시했고 마리아는 말씀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나 일하는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하였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정을
가지고 “하나님,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해 주십시오” 하는 사람보다, “하나님, 제가 듣겠나이다. 말씀하십시오”라고 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문제를 예수님은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오늘은 바쁜 세상에서 빠져나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일 중에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앞에 가고 뒤에 가는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 배운 사람도 가고 못 배운 사람도 가며, 부자도 가고
가난한 자도 가고, 노인도 가고 어린 아이도 갑니다. 믿음 없는 사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 좋은 사람도 갑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전 3:2)고 했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라”(히 9:27)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 14:1)고 하시면서 또 다른 세계가 있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도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생활은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죽음은 또 다른 세계로 연결된 통로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영원한 천국은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려면 배추벌레의 모습을 벗어야만 합니다. 죽음은 마치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거짓과 육욕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죄의
부산물인 질병, 슬픔, 가난, 고뇌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완전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죽음은 최고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아침에 새로운 날을 맞이하듯 성도는 죽으면 천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장례식은 ‘영결식’이 아니라 ‘이별식’입니다. 잠시 헤어졌다가 천국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을 소망하면서 죽음 이후에 있을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죽음을 이기고 승리를 얻는 생명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아멘.
물건은 눈으로 봅니다. 음악은 귀로 들어야 합니다. 음악을 눈으로 들을 수는 없습니다.
음식 맛은 눈으로도 귀로도 볼 수 없습니다. 음식은 혀로 맛을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믿음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지 계십니다. 자연 속에도 계시고, 인류의 역사 속에도 계시고, 인간의 마음속에도 계십니다. 그런데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 그러면 믿겠다”고 하는데
그것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상은 구석 구석 ‘전파’라고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라디오 주파수만 맞추면 모든
방송을 다 청취할 수 있습니다. 안테나를 세워놓고 TV만 틀어 놓으면 지구 저편에 있는 방송까지도 시청할 수 있습니다. 핸드폰만 있으면 지구
반대편과 전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게 적당한 도구가 있느냐, 주파수가 제대로 맞추어졌느냐하는 것입니다.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없다는
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영파를 맞추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구절 구절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찬송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사람마다 우선 가져야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서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말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그분, 즉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주님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주님을 만나면, 그분이 나에게 믿음을 심어 주시고, 소망을 갖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오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주셨던 주님을 만나시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자녀로 불러 주셨사오니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아멘.
조선에 유입된 가톨릭교회가 체제와의 병존을 전적으로 거절하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훗날의
개신교회보다도 이 방면에서의 노력이 특출하였다고 본다. 예를 들어 정하상(丁夏祥)의 『상재상서』(上宰相書, 1839)와 같은 책은 한국의
개신교회 선교 실현과정에서는 보기 드문 기독교 변증서의 일종인 것이다.
정하상은 황사영의 처남이었는데, 그는 확실히 황사영과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친족의 순교를 눈에 보고 자랐다. 변증되지 않은 격렬한 신앙이 가져오는 비극적 결말이 그의 마음에 끼친
영향은 다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4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가톨릭교회는 교세의 증가와 함께 조직화의 결실을 낳고 있었다.
그가 『상재상서』를 쓰기 얼마 전 가톨릭교회 조선교구가 독립하게 된 것이다.
대개의 변증서가 그러하듯이 정하상의 『상재상서』도 교리
자체보다는 오히려 교리의 체계적 설명과 그에 따른 전파 문제에 더욱 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우선 불교를 공격함으로써 조선조의
기독교 이단 시비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오래 중국에 퍼져 있었음을 실증적으로 제시하여 기독교의 진리성을 증명하려 했다. 조선
사회가 정통으로 믿고 기대왔던 중국의 실체와 이단으로 배척했던 불교의 교리를 양 극단에서 함께 동원할 만큼 그의 기독교 변증의 폭은 넓었고 그
방법은 당시 체제의 사상적 핵심에 뚫고 들어갔다.
더 나아가 정하상은 기독교가 현실적이요 ‘이국지원’(理國之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윤리적 현실성이 깊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십계명은 ‘충서효제인의예지’(忠恕孝悌仁義禮智)를 포괄한 지선(至善)의 법도로서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유교의 이념에서 보아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기독교인만이 홀로 임금의 적자(赤子)임을 주장할 정도로 그의
변증은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기독교 변증가들이 그랬듯이 그의 노력은 변증의 대상이었던 조정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실패한다. 겨레의 단심에 충심으로 호소한 기독교인 정하상, 그는 마흔다섯 살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 때의 일이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요 12:9)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그를 본 자들로 인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점점 더
퍼져갔습니다. 때문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당황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문제의 발단의 되는 예수와 나사로를 죽이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그 일을 행한 주님만 죽이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드러난 현상만을 보고 그 현상이
생겨나게 된 근본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인다고, 나사로를 죽인다고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샘의 물을 퍼낸다고 샘의 근원까지도 다 퍼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매일 밖에 나가 노느라고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집안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하루 종일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컴퓨터를 없애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에 재미를 못 가지는 아이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근본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습니다. 안에 갇힌 아이가 몹시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가 문을 열기 위해서 바로 문 앞에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모든 염려가 사라집니다. 불안과 염려는 ‘믿음 없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때로 당시 유대인들처럼,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문제만 보느라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더 멀리 보아야 합니다. 드러난 겉모습이 아니라
숨겨진 근본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돈이 없어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지금 힘들어하는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해서입니다. 문제는 돈이 아닙니다.
경제 불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믿음, 바로 그 믿음만이 우리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 주님을 십자가에서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항상 함께
계심을 분명히 믿고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썩는 것이 질서입니다
•요한복음 12:20∼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음식이 맛있으려면 배가 고파야 합니다. 배부를 때 먹는 음식은 아무리 귀한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배가 고프게 하신 것은 매 끼니마다 맛있게 밥을 먹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귀한 것을 얻으려면 힘들게 고생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영광을 얻으려면 먼저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해야 합니다. 아픔을 겪어보아야 낫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고난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이유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지 않고 화려한 영광만 생각하던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이란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단의 영광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땅에 떨어져 땅 속에 들어가 썩어야 합니다. 땅 속에서 자신의 몸이 죽고 썩어야만 후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곧 다른 말로 하면 ‘썩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체가 완전히 없어질 만큼 철저하게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썩어지고 비워져야만 더 풍성한 생명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풍성함의 시작입니다.
밀알 한 알이 썩어짐으로 새로운 더 많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은 우주의 질서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체는 다 썩습니다. 나무도 썩고, 물도 썩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도 죽으면 썩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은 썩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냉장고도 썩지 않고 텔레비전도 썩지 않으며 플라스틱도 비닐도 썩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심령이 썩어지는 것은 썩지 않는 것들을 너무 많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는 것은 병든 것입니다. 썩는 것은 창조의 질서요, 썩지 않음은 파괴의 질서입니다. 우리 모두 창조의 질서 속에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낮아지고 먼저 죽고 먼저 썩어짐으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요 12:27)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이미
아셨지만, 막상 그 일이 닥쳐왔을 때에는 또다시 새롭게 각오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친히 감당해야 하는 것인 줄 아셨지만 그 일이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주님은 다시금 번민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십자가의 잔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리고 죽은 이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으셨지만,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기도하시는 중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앞에 두었을 때 주님처럼 기도하면서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결단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기도하면서 마음을 재확인하고 다시 결심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미쉘 꽈스트라는 프랑스 신부는 『참 삶의 길』 이라는 그의 책에서 “사랑은 의지의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훈련해야 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봉사와 나눔도 훈련해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사하는 것도 훈련해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도하시는 중에 자신의 생각을 뒤로하고 먼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기를 결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 순종하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순종은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기도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그리고 중요한 일들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셨습니다. 우리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 순종하는 훈련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1)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고
계셨습니다. 오늘은 그 주님이 고난주간 중에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베푸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세족 목요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노라면, ‘세족 목요일’인 바로 오늘이 고난주간의 절정으로 가는 길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기억될 가장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성만찬을 베푸셔서 당신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잔’을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늦은 밤에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 자리에서 가룟 유다의
입맞춤으로 대제사장이 보낸 군대에게 붙잡히셨으며, 밤새도록 가야바의 집 뜰과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다니며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히 오늘부터 주님의 하신 일을 하나하나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족
목요일’,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과 그날 밤, 겟세마네에서 대제사장이 보낸 군대에게 붙잡힌 것을 기록한 요한복음 18장 사이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5절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이고, 6-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 20-26절은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위한 주님의 기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비교적 간단히
전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에 비해 요한 기자는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기도의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일을 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 미명에’ 혹은 ‘하루 일을 마치고 한적한 시간에’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셨던 분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하나님 앞에
나아가셔서 드리신 주님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 다음으로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온 세상과 교회를
위하여 드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범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을 생각하며 깊은 묵상과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기 전 기도와 묵상으로 새 힘을 얻도록 하십시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 3:38)
오늘은 ‘성(聖) 금요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입니다. 우리는 지난밤에도
편안한 잠을 자고 오늘 새날을 맞이했습니다만, 우리 주님께서는 어제 저녁부터 밤새도록 빌라도 법정과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 다니셨고,
이른 아침에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로자(via Dolorosa)’, 즉 ‘슬픔의 길’을 따라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제 삼 시가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막 15:25)고 전합니다. 우리들의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오늘 오전
9시에 이미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제 육 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요 15:33) 주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1년 중에서 가장 엄숙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깊은 슬픔
가운데 보내야 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던 베드로의 자신있는 고백과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대답을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우리는 말을 아끼고, 말을 조심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용기’가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며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4) 했을 때 곧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종종 침묵이 웅변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말이 세상을
어지럽게 합니까? 또 얼마나 많은 말이 인간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가도 말
한마디 때문에 받은 은혜를 모두 쏟아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만큼은 우리의 입술을 조심하고 말을 삼가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던 시간을 기억하며 우리가 있는 곳에서 침묵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경건의 훈련이 될 것입니다. 성(聖) 금요일을 보내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부끄럽고 추한 죄인이 가슴을 조아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불러
봅니다. 오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아멘.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1)
오늘은 고난주간의 마지막 날입니다. 주님은 무덤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울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실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가능해졌고,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와 허물이 흰눈같이 깨끗해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복된 소식을 듣는 기쁨을 누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죄도, 원수도, 죽음도 사라졌고 자유와 화해와 해방
그리고 영생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새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형제를 살리고 도와주며 격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십시다.
긴 사순절은 오늘로 끝이 납니다. 교회들은
오늘, 특별히 분주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내일 있을 부활절 예배, 축제의 잔치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상징하는 계란을 삶아 예쁘게
포장하고, 부활을 알리는 천사들의 나팔 같은 백합을 준비하여 제단을 장식합니다. 온 교회는 교회당 안팎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고, 그 동안 전도하려고 작정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에게도 연락해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예배에 초청합니다. 아직 우리 주님은 무덤 가운데 계시지만, 우리 마음은 이미 들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이 사망권세를 이기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벌써 축제가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정중동’(靜中動), ‘조용한 가운데 이미 작은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절 축제를 준비합시다.
지금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난/ 목숨의 향기 캄캄한 가슴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별 하나가 숨어 있어요 당신의 부재조차/ 절망이 될 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 옷
입은/ 천사의 나팔 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 (이해인, “백합의 말”) 오늘은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주님,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는 첫 음성이 당신을 향한 신앙고백이 되었고, 하루의 첫 노래가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이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멘.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교회는 하필이면 스스로 천주교(天主敎)로서 이름하였다. 우리는 조선
실학자들의 서학(西學) 접촉의 면면에서 이러한 예증을 숱하게 발견한다. 일례로, 실학파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인 이수광(1563-1628)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 1614)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면서 “천주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으며, 안양의 도(安養之道)로 세상을 주관하심을 논했다”고 말한다. 불교의 윤회 교설과 인간의 성품이 본래 착함을 말한 교황의 뜻까지도
소개한 그였지만 기독론과 성서의 문제는 논급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천주교라 이름한 조선 가톨릭교회의 관심을 일단
확인하게 된다. 한국교회사학 연구의 대석학 민경배(閔庚培) 교수의 실증대로, 조선의 가톨릭교회는 신론(神論)에 초점을 두고 간 것이다. 이후 이
교회의 역사에서 유가(儒家)의 상제(上帝)와 기독교의 이른바 천주를 동일시하는 문제를 검토하여 간 경우 등에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한다.
가령, 실학자 중 한 사람인 이익(李瀷, 1681-1763) 역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한다. 그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가 유가의 상제와 같으며 경건과 신앙의 입장에서는 불씨(佛氏)의 석가와 같다고 추정한다. 그는 이수광과는 달리 예수에 대한 상당한
발췌를 하고 있다. 곧 처녀 탄생의 경위, 그의 선교,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그리고 그의 가르침이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퍼져 있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의 기독론의 언급이 종교적 회심이기보다는 비교종교학적 명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유가의 상제와 불씨의 석가와 기독교의 천주가 서로 같다고 여기며, 예수에 대한 발췌 역시 이 천주에 대한 학자적 서술의 형태에서 그 궤도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독론적 접근의 부재는 조선 가톨릭교회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내의 성육신과 그 구속의 은총의 교리의 등한시는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실존적 경험과 그
회심의 모습이 드물었던 이유로 이어진다. 이 교회의 신앙은 나의 문제로서보다는 사회 구조의 문제로서 그렇게 각인, 전개되어
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유월절 저녁에 마지막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은
당혹스러움과 더불어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가 하면, 가룟 유다가 배반할
것이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며,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행동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 제자들이 거할 곳을 준비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소망의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망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현실을 보았습니다.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반문하는가 하면,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라고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과거 조상들에게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금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오직 그분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눈앞에 무엇이 보이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느냐’ 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을 연결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더욱이 그 예수님은 곧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어떤 어려운 난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내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붙잡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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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라(요 14:16∼17)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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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LINE-HEIGHT: 13pt" background="http://www.cbs.co.kr/qt/">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의 번역인데, 어떤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달려와서 도와주는 사람, 혹은 재판을 받으려고 서 있는 사람 곁에서
법률적인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은 이미 보혜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보혜사이시며,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은 신자들의 위로자요, 상담자요, 변호인입니다. <BR><BR>또한 성령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증거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17절 말씀처럼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BR>성령님은 주님이 주신 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구약의 율법과
같이 여러 조문들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붙들림 받아야 사랑의 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있으며, 또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BR><BR>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강림하시면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기에 재물이나 지위, 권력과 같이 환경이 변하면 쉽게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심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BR><BR>성령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복음 사역을 계속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믿는 자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지속적인 공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우리의 삶에 평안과 기쁨과 승리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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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background="http://www.cbs.co.kr/qt/"><!-- 오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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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LINE-HEIGHT: 13pt" background="http://www.cbs.co.kr/qt/">우리의 참 행복의 근원이신 성령님, 우리 속에 임하셔서 우리의 마음이 기쁨과 평안과 감사로
넘치게 하옵소서. 아멘.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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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성도들 간의 내적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지는 두 가지의 용도로 사용됩니다.
포도를 맺는 장소로 사용될 수도 있는가 하면, 포도나무에서 잘려 땔감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가지인 우리들이 풍성한 포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농부는 좋은 수확을 위해 과실 맺는 가지를 깨끗하게 합니다. 즉, 가지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가지의 모세관에 불순물이 고이면 뿌리에서 수분을 흡수하지 못해 결국엔 말라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우리 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로 인해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막히고 우리의 삶은 시들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나타나는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때, 우리 영혼에 생명력이 넘쳐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지는
나무에 꼭 달라 붙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와 관련 없이 자기 나름대로 노력하여 열매를 맺으려 할 때, 그 가지 또한 말라 죽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분과 양분을 취하지 않고 열매를 맺으려 하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가지가 해야 할 노력은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라, 나무에 부단히 붙어 있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래야 가지는 제대로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맺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가질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 가지에 작은 열매가 맺히고 과즙이 풍부한 알맹이로 무르익어 결실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크리스천의 삶의 열매는 주 안에서 기도할 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그의 말씀을 따라 기도할 때 응답받는다는 약속은, 감춰진 보화와 같은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 갈 때, 그리스도인은 구하는 것을 받게 되며 점점 더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풍성한 수확을 보시고 즐거워하시며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주 안에 거하는 삶은
우리에게는 복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범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의 삶에 풍성한 열매가 맺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아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두 친구가 곰을 만나 쫓기다가 그 중 한 사람은 나무에
올라가 곰을 피하고 또 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땅바닥에 엎드려 죽은 체하고 있었는데, 바닥에 엎드린 사람에게 곰이 다가가 킁킁거리다가
돌아갔습니다. 나무에 올라갔던 친구가 내려와 곰이 뭐라고 말을 하더냐고 묻자 바닥에 엎드렸던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친구를 두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녀석하곤 더 이상 만나지 말래.”
세상을 살면서 꼭 얻어야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도 있고,
넉넉한 재물도 있고, 또한 지속적인 건강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좋은 친구를 얻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하버드 대학 경영대학원 교재를
보면 두뇌의 비상함이나 기술의 뛰어남은 성공 요인의 10%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대인관계는 성공요인의 85%나 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잣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친구관계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는 그것이
곧 주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친구관계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친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사랑 받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셨고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 같이 내가 먼저 다가가서 주님의 사랑으로 친구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정한 희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친히 진정한 우정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우정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정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을 그 사람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신 주님,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나도 다른
이들에게 베풀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3)
영국의 대설교가였던 스펄젼의 일화입니다. 한번은 그가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형편없는 설교를
했습니다. 허둥대면서 더듬거리는 말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오늘 설교는 망쳤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설교 후에 스펄젼은 무릎을 꿇고 “주여,
주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필요한 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엉터리 같은 설교를 축복하소서”하고 밤을 지새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다음 주에
설교를 잘하여서 보상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의 설교는 만족스럽게 끝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와서 은혜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설교를 듣고 41명의 회심자가 생겼지만, 그가 자랑스럽게 끝냈던 설교에서는 단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실 것인가? 성령께서 나를 통해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라는 물음에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되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 듣게 되는 수많은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언제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내 머리와 내 지식과 내 사고로
말씀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눈과 머리를 열어 주셔서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성령께서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장래일은 일기예보처럼 단순한 정보의 전달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앞길을 보여 주시고 인도하며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내 인생의 밑그림을 성령께서 친히 그려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내 앞길을 이끌어 주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성령님, 오늘도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내 앞길을 이끌어 주옵소서.
아멘.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요즘은 웰빙 전성시대입니다. 질 높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입니다. 이러한 웰빙바람과 주5일 근무제 같은 사회적 여건을 타고 여가활동도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웰빙 방법과 여가활동을
통해서 심신의 평안을 찾고 있습니다. 땀 흘려 운동한 후에 느끼는 상쾌함이나 맛좋은 음식을 먹은 후에 느끼는 만족감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히 효과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얻는 평안은 유한한 것이며 그 한계가 분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평안은 ‘+의 평안함’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얻었을 때, 무엇인가 채워졌을 때 생기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평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한 평안의 자리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평안은 ‘+의 평안함’이 아니라 바로 ‘예수 안에서의
평안함’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을 때 참된 평안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의 평안함을 날마다 확인하며 경험해야
합니다.
둘째로, 환난 가운데서 누리는 평안함입니다. 본문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환난’과
‘담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실제로 수많은 환난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담대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절망과 좌절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환난’과 ‘담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상의 모든 환난을 경험하시고 승리하심으로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 영혼이 예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이 아닌 예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평안함은 예수 안에서 누리는 평안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할 때, 세상의 어떤 환난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며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하늘의 평안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안에 거할 때 누리는 평안함이 우리의 일생 동안 계속될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옵소서. 아멘.
현대 교회와 사회적 하류층
미국의 저명한 교회사학자 윌리스턴 워커(Wiliston Walker)는 그의 책 『세계기독교회사』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열거하며 종교개혁은 현대 교회사와 구분되며 오히려 중세에 가깝다고 말한 일이 있다. 즉 종교개혁 교회는 중세의 교회와 같이 외부의 권위에 의해서 보존되는 종교, 교육과 문화의 생활 전체를 망라하는 종교의 지배를 강조했다. 단 하나의 예배의식만 인정, 원죄의 주장,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 관여와 그 주재하심, 타계적인 종교관, 신학의 중심 주제로서의 죄와 은총의 문제, 금욕주의적 경향 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현대 교회에서는 상기한 특징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컨대 현대 교회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직접적 영향과 그 가시화 및 단일성의 강조 그리고 종교 바깥에서 종교의 권위를 보존하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세계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 대한 통전적 지배의 위치를 상실한 교회는 이제 교회만의 영역으로 제한되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교회의 가치로부터 중립적으로 되어 언필칭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현대 교회의 역사에는 더 이상 예전의 국교와 같은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교의 형태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국교가 있어도 그것은 더 이상 사회 전체를 통솔하지 않는다. 현대 교회는 그저 다양한 가치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그 역할도 내적이고 도덕적인 몇 영역으로 제한되고 만다.
교회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할 때 거기 가장 크게 타격을 받는 것은 사회적 하류층일 것이다. 사회적 하류층이란 그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보편성과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속화 시대, 영향력을 잃은 현대 교회에서 이들은 유일한 희망인 종교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버려지고 만다.
따라서 현대 교회사에 있어서 사회적 하류층의 인도와 계도의 문제는 다름 아닌 몇몇 깨어 있는 참신한 영적 지도력의 교회들에게 달려 있다. 더 이상 국가 교회로서의 안정적 위치는 보장되지 않는다. 이제 교회는 스스로의 내적 권위를 통해 사회를 품어내는 간접적 영향력을 펼쳐야만 한다. 현대 교회에 속한 한국 교회와 그 역사는 어떠한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저 같은 목사는 말문이 막히면 함께 기도하자고 합니다. 말문이 막혔다는 것은 처지가
궁색해졌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자고 하면 우리도 모르게 힘이 빠져 버립니다. ‘길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하면 모두 좋아할 터인데
말입니다. 기도는 다른 방법이 없거나, 힘이 모자랄 때 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젊어서는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쓰고,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의 힘을 알게 되면서 몸보다는 마음을, 머리보다는 가슴을, 경험보다는 진리를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간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저는 기도의 소중함을 더 알아갑니다. 기도를 무기처럼 써서 목적을 이루는 것이 저의 지난날의 모습이었다면, 요즈음은 기도를 저를
담는 그릇처럼 쓰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의 자식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서 들은 ‘목사는 평생을 기도하며 교인들을
위하여야 한다’는 말씀의 무게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는 목사를 가진 교인은 참 행복합니다. ‘이 사실을 교인들도 정말
알까’ 하는 궁금함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아버지의 기도를 늘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를 위한 아버지의 기도를 들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슬픔을 더하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생전의 아버지의 기도가 다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는 아버지가 겨울
새벽에 입으셨던 털이 다 해진 낡은 외투를 기억합니다. 그분에게, 제게도, 아버지의 교인에게도 그 외투는 보물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저는 새삼스레
느낍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도하며, 목사가 교인을 위해 기도하며, 선생이 제자를 위해 기도하는 그 귀함을 저는 요즘 더
절감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은 알 듯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살점을 떼어 내듯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천천히 읽으시고 우리도 주님처럼 기도하십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정성껏 기도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큰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보다 더 적극적인 사랑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우리 꼭 그렇게
합시다!
사람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싸매는 일입니다. 씻기고 맨살을 천으로 싸는 일을
시작으로 옷을 지어 입히기 시작하면 사람 꼴이 난다고 합니다. 평생 동안 옷을 입고 삽니다. 죽어서까지도 옷을 지어 입히고서야 안심합니다. 먹는
일과 함께 입는 일이 우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벌거벗은 것을 가렸고 하나님께서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을 보면 입는 일은 우리가 무시하기에는 간단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모두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옷에 신경을 씁니다. 전도사 시절 저는 양복이 여름용과 겨울용 단 두
벌이었는데 지금은 옷장에 양복이 가득합니다. 목사도 그러한데 교인들이 입는 일에 마음 쓰는 일을 어디 탓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식이나 동창회라도
가려 하면 더 그렇겠지요. ‘오늘 무슨 옷을 입을까요?’는 우리 모두의 관심이며 물음입니다. 육신으로 사는 일이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도 너그러이
웃으시겠지요. 스무 살인 큰딸도 입는 일에 마음을 많이 씁니다. 멋 내고 싶어서지요. 그런 딸에게 제가 아쉬운 것은 입어 멋 내려는 것처럼 믿는
일에도 그렇게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어디 아버지 눈에 차겠어요?’하는 딸의 애교를 들으면서 꼭 그래 주었으면 합니다. 교인들에게도 같은
바람입니다. “오늘 무슨 옷을 입으셨어요?”라고 제가 물으면 “물론 진리로 거룩함이라는 옷을 입었어요”라고 씩씩하게 답하며 멋있게 믿어
주었으면……. 그래서 딸과 교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저들이 거룩함이란 옷을 입고 멋지게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소서. 거룩함이란 진리의 말씀이라는 실로 짠 옷임을 알게 하옵소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응하게 하옵소서.
거룩함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든든하게 살도록 우리에게 주신 갑옷임을 알아 기쁨으로 입게 하옵소서. 그 거룩함을 옷 입고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잔치자리의 예복을 정성껏 준비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다 주님 앞에서 벗은 자로 남지 않도록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24)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우리에게 기쁜 일이 생길
때나 감사한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소망과 기대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것일까요?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영광을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이라 말씀하시고는, 그 영광을 제자들도 보기 원하신다 하셨습니다. 또한 그 영광에 함께 들어가기 원한다 하십니다(요 17:24-26).
하나님의 영광은,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미실현의 영광이며, 주님과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도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길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데 있습니다(요 17:24).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살과 피가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통해 사함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과입니다. 즉 구원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과 귀한 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것도 하나님의 영광에 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이 진리를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하나 된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꼭 실현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고백 따로, 생활의 모습 따로’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말로가 아닌 삶으로써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의 굳건한 신앙이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창세
전부터 주신 영광에 들어가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영광을 우리도 함께 보고 기뻐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예수님-우리’가 하나가 되길
원하시며, 우리도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우리의 복된 비밀입니다. 요한과 다니엘이
보았던 하나님의 비밀입니다(요일 2:12-17, 단 2:17-30). 구원의 비밀,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셔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으로
행복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을 기뻐하게 하소서. 구원의 확신으로 흉악한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아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눅 3:4)
펌프로 물을 퍼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을 빈 펌프 안에 부어야 합니다.
이 물을 부으면서 펌프질을 해야 아래 고여 있던 샘물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이때 붓는 첫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시는 길을 여는 첫 번째
일이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는 사람에게 구원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중물을 붓지 않은 채로 하는 펌프질은 헛 힘만 쓸 뿐 물을 끌어 올릴 수 없는 것처럼, 준비하지 않고는 구원을 볼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바라는 사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기다려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절제와 나눔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힘을 부당하게
행사하여 재산을 늘리려는 생각을 버리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그의 재물을 빼앗았던 불의를 고쳐야 합니다.
구원을 바라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구원의 세계를 실천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구원의 세계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날은 상을 받는 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판을 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날은 진노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은 추수하는 날과
같아서 좋은 열매가 아니면 버림을 받으며, 열매 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집에 손님이 오실 때면, 먼저 집안을 정리하고
청소합니다. 그것은 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다리던 귀한 분을 정성스럽게 맞이할 차비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오신다 하여도
늘 기다림으로 사는 사람에게 주님의 오심은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마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은 칭찬받을
것입니다.
사랑의 섬김과 나눔의 행위는 주님을 찬미하며 맞이하는 준비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오신다 하더라도 부끄러움 없을지, 주님을
마중 나갈 수 있을지, 내가 오늘 닦고 고쳐야 할 것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루를 마치며,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을 마중 나가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정직하고 의롭게 삽시다.
다시 오실 주님, 항상 깨어 있어 주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영광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2)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은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은 말이 아니라, 실제로 나타난 사건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뒤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고,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도 사랑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줍니다. 성령님은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고, 우리에게도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알아
주십니다(고전 8:3).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자녀가 됨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가정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우리 신규가 / 젤 예뻐 / 아암 문규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 이만큼 선물을 / 사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
박목월의 시 〈밥상 앞에서〉 중.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받고 기쁨을 드리는 저희들, 언제나 주님 앞에 둘러앉을 때 사랑으로
즐거워하고 주님을 찬송하게 하소서. 아멘.
경술국치의 한일합방으로 한국은 나라를 잃었다.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흩어졌다. 그러나
그때에도 땅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교회는 보았다. 국토의 신앙, 하나님 주신 땅에 대한 찬양과 고백이 일제하 한국 교회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애국가가 그때 등장한다. 감리교인 윤치호(尹致昊)의 작시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감격으로 부른 노래가 울려 퍼질 때마다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되새기는 겨레의 가슴은 터질 듯
부풀었다.
삼일운동 직후이다. 무궁화 선생으로 알려진 남궁억(南宮檍)은 이 땅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금수강산임을 알았다. 일제의
탄압은 삼일운동이 끝난 후에 더욱 거세지고 문화통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의주의와 세속화의 격랑이 강타했던 그때 하늘을 향해 솟구친 그의
찬송은 맑고도 선명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렇게 노래한 그는 감격에 겨워 한 번 더 부르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하고 노래한다.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그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그리고 다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불렀다. 불러도 불러도 다시 부르고픈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동산이며 주님께서 일하라고 이
겨레를 부르시는 아름다운 땅이라는 고백이었다.
일제 침략의 발길이 다가섰던 1900년에 이미 “이제 다가올 세기, 서기 2000년의
조선은 발전과 개선을 거듭하여 오늘의 조선과 비교해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 아, 이 조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100년 후의
그날 내 다시 조선에 되돌아오고 싶구나” 꿈꾸었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제하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