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가 버터필드(H. Butterfield)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곳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일이든지 이미 반쯤은 냉소적인 태도를 굳히고
보는 이들이 있다.” 기독교인의 자세는 어떠한가.
처음 한국 교회에서 찬송가를 편집한 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찬양과 감사는 기독교에만 있다고 보았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곳이요 따라서 창조하신 그분이 섭리하시는
신성한 곳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주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 구원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 세상과 역사이다. 여기서 역사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장소요, 그분의 구원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자각이 없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설령 이해되지 않고 흡족하지 않더라도
거기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고 조화를 추구하고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역사는 온통 하나님의 계시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포착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자신과 자식의 목숨이 가죽부대 하나의 물에 달려 있다고 절망한 나머지
바로 곁에 있는 샘물을 보지 못했던 하갈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범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이 군국주의의 외길로, 절대화의 우상의 길로
치달을 때 김교신(金敎臣)은 고요히 하늘로 눈을 들어 이 땅에 맡겨진 하늘의 사명을 찬양하였다. 1934년 『성서조선』(聖書朝鮮)에 실린 그의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는 이러했다. “낭림산(狼林山) 머리 위에 하늘을 향한 좌완(左腕)을 백두산 저편까지 높이 뻗치고, 장산곶 끝까지
우완(右腕)을 드리워 어루만지려는듯, 우각(右脚)의 태백산은 거제까지 굽혀 올리고, 좌각(左脚)의 소백산은 진도까지 뻗쳐 디딘 듯,
지구대(地溝帶)는 허리가 잘룩하고 금강산은 가슴에 드리운 노리개인 듯, 몸을 가리운 능라(綾羅)가 동풍에 나붓기어 녹색 평야를 이루었으니 엷고도
가볍다. 선녀 바야흐로 구름 위에 소스르치랴는 자태인가, 혹은 자유의 여신이 대륙을 머리 위에 이고 일어서려고 허리를 펴는 형상인가.” 그런데
이 조선을 김교신만 보았던가. 다들 절망과 공포로 마음을 닫고서 역사에서 내뿜는 계시를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