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애 2:11)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받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돌이키고 돌이키라’고 부르짖습니다. 심판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의 외치는 소리에 귀를 막아 버립니다. 그들은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죄악 가운데 머물렀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온 세상에 임할 심판과 멸망의
날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벧후 3:7). 그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벧후 3:10).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베드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고 말씀합니다. ‘회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회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선물은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회개는 생명의 길입니다. 회개하는 자는 이 땅에서 천국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중심에 두고 살아감으로 천국의 풍성한 복을
누리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음란하고 악한 이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 따라 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오늘 읽은 예레미야 애가서의 애가(哀歌)라는 말은 헬라어의 ‘큰 소리로 높여 운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제목은 ‘어찌하여…’라는 탄식과 비통한 감정을 담은 ‘에카’(ekah)로 되어 있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 그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경험을 한 저자 예레미야는 이 아픔의 시를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몇몇의 시편들처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1.감사하세 2.날 구원하신 주 3.다
찬양하세 4.랄랄라 찬양하세 5.마음으로 감사하세 6.바다 같은 그분의 은혜를…… 하는 식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이 총 22개이므로 각 장은
22절로 끝나며 3장(66절)의 경우는 한 글자에 3절씩 적어 내려 역시나 22절의 구조(22×3)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답관체’라 부르는
히브리 문학양식입니다.
아픔을 적어 본 일이 있으십니까? 속상함을 헤아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예레미야는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11절)라고 그 아픔을 노래합니다. 아픔을 절절이 적어 내려간 애가. 한 자 한 자,
히브리 알파벳에 새겨간 예레미야의 눈물의 고백입니다. 주를 향하여 부르짖는 눈물의 기도입니다. 아픔 없이는 부를 수 없었던 노래, 그것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우리 중 누군가의 기도입니다. 아니, 저마다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기도입니다.
평생을 결핵성
척추병, 파키슨 병과 피부질환 그리고 말년에는 암으로 고생한 일본의 여류작가 미후라 아야꼬의 고백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聖所)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聖顔)이 있다.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다.”
오늘 하루가 행여 어둠과 아픔의 시간으로 주어진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 허락하신 날임을
기억하며 감당하게 하옵소서. 아픔으로 인해 날 깨어 있게 하심을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단답식의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객관식으로 보기가 주어진 문제도
아닙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묻고 답해져 왔던 물음, 그것이 고난과 고통의 문제입니다.
욥기가 들려주는 고난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고난의 문제, 특별히‘선한 사람’과 ‘하나님 백성’에게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들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분명한 것은 고통에 대해서, 특히나 남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언약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버린 주전 587년의 비극은 언약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에게
적잖은 의아심을 품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파괴를 묵인하셨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왜 우리 교회에 이런 일이…’독일의 신학자인 도로테 죌레는 그의 저서
『고난』(suffering)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것이 누구를 섬기는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을 섬기는가, 악마를 섬기는가, 살아 있는 자가 되게 하는 원인인가, 도덕적으로 무력한 자가 되게 하는
원인인가?” 즉, 그는 ‘이 비극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묻기보다 ‘이 비극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보배로운 정금 같은 자리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져져 깨진 질항아리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린 시온의 아들들. 그들의 비극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고백은 이후 사도 바울의 입술을 빌려 이렇게 바뀝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본디
그들이나 우리나 정금같이 보배로운 까닭은 다만 보배되신 예수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가 보배로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고
그분을 모시지 못하면 다시금 던져진 질그릇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깨어 묵상할 일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희의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귀기울이게 하옵소서. 아멘.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 5:21)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당하게 된 수치와 수욕을 돌보아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기업과 집이 외인에게 돌아가고 아비 없는 고아 같은 신세가 된 이스라엘. 목이 눌리고 곤비하여 쉴 수조차 없는 안타까운 이스라엘. 부녀들과
처녀들이 욕을 당하고 굶주림의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철저히 무너진 이스라엘…….
삶이 무너진 자리에서 원망보다 치유를 위한
기도가 나오는 건, 또한 내 치유보다 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먼저 나오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그 자리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대신하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타자를 위한 기도, 긍휼을 바라는 기도, 그것이 예레미야의 눈물 어린 기도였습니다.
산에 올라가 내려옴이 더딘 모세를 기다리지 못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원했던 무지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던 모세를
기억합니다.“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참으로 원망만
하기에도 모자란 그 백성들을 위해 자기 이름을 지워 달라고 안타까운 떼를 쓰는 모세의 중보기도를 기억합니다.
십자가 위에서조차 이
사람을 용서해 달라는 중보의 기도를 놓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처럼 지경을 넓혀 가는 그분의 간절한 기도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 모두 애끓는 연민에서 출발한 것임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과 그 영혼을 바라보는
연민의 눈에서, 그 사랑스런 눈에서 출발한 중보의 기도……. 오늘 우리의 것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모두 무너져 버린
세월에서, 모두 힘을 잃은 절망 앞에서 넉넉한 연민의 마음과 배려의 마음으로 기도를 잃지 않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한 사람의 든든한 기도로
많은 영혼이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습니다. 깨어 있는 한 영혼으로 인해 그리고 그의 기도로 인해 큰 복을 얻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픈 마음으로 긍휼을 바라는 중보의 기도를 드렸던 예레미야와 그의 슬픈 노래 애가! 슬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픔 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엎드려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나와 이웃을 위한 희망의 기도,
긍휼을 바라는 기도를 잃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미국은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합중국(合衆國)이다. 그런데 유럽 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간 사람들로 해서 미국이 태어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미국은 동시에 여러 교파의 교회들이 함께 사는 합종국(合宗國)으로 불러 부족함이
없다. 그만큼 미국의 탄생 배경에는 종교적 요소가 강하다. 한편 미국은 야구로 유명한데, 야구의 구조는 미국의 종교적 성격을 드러내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본다. 야구에서는 홈인, 곧 집으로 돌아오면 점수가 올라간다. 그리고 일루와 이루와 삼루를 거쳐 홈런, 곧 집으로 달린다.
홈으로 달리지 않는 한 일루, 이루, 삼루를 도는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항상 돌아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생각이다. 성경은 온 천하 족속이 다함께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종교공동체의 모습으로 이를 묘사한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난 방황은 거기 걸린 시간과 거리가 길어지면 길어지는 만큼 낭비되고 만다.
1960년대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대장정으로
세계 속의 한국을 지향해갔다. 한국 교회 역시 미래 저편에서 움솟는, 세계를 누비는 교회의 모습을 꿈꾸었다. 그런데 세계로 나아가는 그 장도에서
교회는 자꾸 신앙의 근원을 강조한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통일찬송가 중 1967년 한국인 작시의 곡이 총 아홉 개이다. 이 찬송가들은 대개
새로운 역사를 대하는 기독교회의 다짐을 주제로 한다. “우리들은 주의 자녀 부름 받은 한 형제, 몸과 마음 다 바쳐서 주 뜻대로 살리라/
십자가를 높이 들고 노래하며 나가자. 하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까지.” 이렇게 교회는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는 길이 신앙의 내연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가정은 세계로 나아가는 도약의 진원지로 제시된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에 찬송 부르십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함을 얻으리 외워주신 귀한 말씀 이제 힘이 됩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신앙의 가정에서
세계 속의 한국, 그 미래가 밝아오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스 3:12)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정말 힘들면서도 또한 감격적인 일입니다. 예루살렘 귀환이 있던 해
칠월에 예수아와 제사장들과 스룹바벨 등이 모여 솔로몬 성전의 제단이 있던 자리에 새로 단을 만들어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번제를 드리다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번제단은 회복되고 번제는 다시 드려졌지만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파괴된 성전이 아직 재건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귀환한 지도자들은 성전을 다시 짓기로 하고 재료를 준비해 귀향민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약
1년 만에 성전의 주춧돌을 놓고 성전의 지대(기초)를 완성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성전 기초를 놓는 정초식 장면을 묘사합니다.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인들은 제금을 들고 여호와를 찬송했으며 서로 찬송으로 화답하니 그 모습을 보던 백성들도 역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바로 이때 백성들 가운데 대성통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백성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기뻐 찬송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광경 아닙니까? 대성통곡을 한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나이가 많아 첫
성전(솔로몬 성전)을 본 적이 있던 노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새로이 재건될 성전의 기초를 보니 약 50년 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될
때의 그 비참한 기억이 떠올라서 통곡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성전기초가 예루살렘 첫 성전의 그 영화로움과 비교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에
서러운 마음에 운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은 종종 있습니다. 수십 억, 수백 억 들여 지은 화려한 성전에 비해 우리
교회의 성전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서러울 수도 있습니다. 오래 된 시골교회나 지하상가에 세든 개척교회는 더욱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으리으리한
건물이나 화려한 외형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작고 초라해 보이는 교회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피 흘려 세우신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자체만으로도 우리
교회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내 교회를 사랑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좋은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임을
잊지 맙시다. 성도들이 교회에 자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때 그 교회는 참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참으로 사랑하며, 우리 교회에 자부심을 갖게 하시고, 또한 우리 교회를 자랑하여
떳떳하게 전도하게 하옵소서. 아멘.
이제 감히 왕에게 아뢰오니 이 성읍이 중건되어 성곽이 준공되면 이로 말미암아 왕의 강
건너편 영지가 없어지리이다 하였더라 (스 4:16)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는 과정을 보고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 즉
사마리아인들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 방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대적’이라는 낱말은 ‘좁은 함정에 빠뜨리는 원수’를 가리킵니다.
원수들은 먼저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와서 자신들도 성전 건축을 돕겠다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스룹바벨과 족장들은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한마디 말로 단호하게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스룹바벨과 족장들이 왜 그리
배타적이냐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이들의 요구가 마치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속셈은 진정한 예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력에게 자신들의 주도권을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앗수르의 식민정책에 따라 이주해 온 이방인들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의 혈통과 신앙의 순수성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던 그들에게 있어 여호와란 유일신이 아니라 여러 신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라는 말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너희’ 하나님이라고, 마치 남의 신 말하듯 표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스룹바벨과 족장들은 그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이들은 속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방해공작을
시작합니다. 바사의 관리들을 매수하기도 하고, 심지어 새로운 왕(아하수에로)이 즉위하는 틈을 타 조서를 올려 모함까지 합니다. 결국 이들
사마리아인들의 계략대로 성전공사는 중단되고 오랫동안 재개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원수들의 방해로 인해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거나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수들이 방해한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사탄의 전략은 참으로
주도면밀하고 끈질깁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어떤 방법도 불사합니다. 우리는 영의 눈을 떠서 원수들의 전략을 정확히 파악하되, 아무리 그들의
방해가 극심해도 하나님의 백성은 끝내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영의 눈을 떠서 마귀 사탄의 무서운 전략을 간파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그
계교를 물리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9)
예수아와 스룹바벨 등에 의해 기초가 놓여진 성전은 사마리아인들의 훼방 때문에 공사가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다가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를 통해 주신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시작됩니다.
이번에도 성전 재건의 주역은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예수아)입니다. 본문에는 그런 표현이 안 나오지만 이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중단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1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사모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 정치지도자의 대표인 스룹바벨과 종교지도자의
대표인 여호수아가 다시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사명을 맡게 됩니다.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가 거룩한 일을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된 것입니다.
1장 2절부터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먼저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아직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하시면서, 하나님의 전은 황무하였는데 어떻게 너희는 판벽한(벽을 널지로 꾸민) 집에
거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 한 가지만 보아도 당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어찌 스룹바벨 성전의 규모나 화려함이 솔로몬 성전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만 하나님은 그 크기나
겉모습으로 비교하지 않고 그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이번에 지어질 성전의 영광이 처음 성전의 영광보다 크리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풍성하고 평안한
중에 성전을 지었던 것에 비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결코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 평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성전을 건축합니다. 절대권력을 가진
임금 솔로몬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친 다윗이 준비해 놓은 재료를 가지고 성전을 건축한 것에 비해 두 번째 성전은 정말
어려운 가운데 방해와 중단까지 겪으며 지어집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런 처지와 상황을 잘 아시기에 나중 성전의 영광이 처음 것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쉽게,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상황이나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하는 것이 훨씬
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일임을 기억합시다.
어려움 가운데 드리는 헌신과 충성이 더욱 귀함을 알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 지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16)
하나님께서 잇도의 손자이며 베레갸의 아들인 선지자 스가랴에게 하룻밤에 여덟 가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환상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환상은 낙심한 백성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베푸는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의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주빛 말과 흰 말이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화석류나무 사이에 홍마를 타고 선 분은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여기서는 환상 중에 나타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육체를 입으신 실재의 인물로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요한은, 스가랴가 본
환상은 재림의 때에 홍마를 타고 진노와 피흘림의 심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음을 요한계시록 6장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환상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첫째 인에서 넷째 인을 뗄 때까지 흰 말,
붉은 말, 자주빛 말이 나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듯이, 첫 번째 환상에서 등장하고 있는 붉은 말, 자주빛 말, 흰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준 열국을 징계할 도구들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심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환난 중에도 소망이 있고(롬 5:3-4),
징계를 당하여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녀된 신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히 12:5-8).
죄에서 돌이켜 하늘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환난 중에도 소망을 갖게 하소서. 징계를
당하여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녀된 신분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아멘.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스 5:2)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생활 중에도 큰 꿈을 안고 성전을 건축하고자 예루살렘에
모였지만 원수들의 방해로 성전 공사를 16년 간 중단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의욕을 상실하고 해이해져
성전 재건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학 1:2). 소망이 식어지고 관심이 없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에게 명하시기를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찌니라”(학 1:7)고 하시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성전 건축을 재개하도록 하셨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되자 여전히 대적자들은 방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장로들이 분명한 자세를 취함으로 대적자들은 더 이상 성전 건축을 중지시키지 못했습니다. 대적자들은 성전 건축을
중단시키지 못하게 되자 다리오 왕에게 편지를 보내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의 진위를 알아보게 했습니다(17절).
그 편지에서
방해자들은 누가 너희더러 이 전을 건축하게 하였으며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적인 의지를 용기
있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어떠한 관계인지, 자신들이 고통을 겪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성전 건축의
배경은 무엇인지 등을 용기 있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단의 세력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두려워하지 않고 분명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담대하게 따르면 그 일을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어떠한 사단의 세력이 우리의 믿음생활을 방해해도
담대하게 싸워 승리하게 하옵소서. 아멘.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스
6:22)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기쁨으로 시작했던 성전 건축은 오랫동안 대적자들의 방해로
지연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성전이 완공되어 드디어 감격의 성전 봉헌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이었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어떻게
완성하여 성전 봉헌식을 하게 되었습니까?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고레스와 아닥사스다 그리고 다리오 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앞서 에스라 5장에서 방해자들인 총독들의 조사요청 편지를 받은 다리오 왕은 서적 창고를
뒤져 서적 곳간에서 조사하게 하였으나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메대 지역의 악메다 궁전에서 그 두루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이 궁은 바사 왕의 여름 별장으로, 오늘날의 하마단 부근입니다.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조서를 발견함으로 인해 그 후 대적자들의
방해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은 적극적으로 성전 건축을 위해 지원책을 명하고 정치적으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는 건축 경비가 부족한 것은 왕의 세금에서 충당하여 진행하도록 하였고, 하나님께 드릴 전제물을 제사장이 원하는 대로 날마다 주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조항을 어기는 자는 열왕이나 백성을 무론하고 엄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다리오 왕의 명령을 받은 총독들과 지도자들은
신속하게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드디어 성전 재건 공사는 만 4년 만에(B.C. 516-520) 끝났습니다.
성전이 완공되어
봉헌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정성을 다해 제물을 드렸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드렸습니다. 율법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랜만에 경험하는 즐거움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도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기쁨이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있게 하옵소서. 아멘.
1970년대 한국 교회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스스로 의식하여 다원적인 전도 운동을
일으킨다. 따라서 군선교, 교도소선교, 지역사회선교, 농촌선교, 도시산업선교, 공산권선교, 맹인선교, 교육선교, 해외선교 등 교회봉사의 발걸음이
머물지 않는 곳이 드물었고, 교회선교의 외침이 닿지 않은 곳이 남지 않았다. 만일 가서 머물지 못한 곳이 있었다면 미처 살피지 못하거나 생각지
못한 경우뿐이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 선교 사명의 다원적 수행에는 총화(總和)라는 시대적 물결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지중이 아니고는 모두 찾아 손 뻗었던 한국 교회의 선교 수행의 모습이 바로 사회 전 영역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요, 그것을 기독교
정신으로 통일하고자 했던 교회의 명분을 함께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이 있다. 전자의 경우, 국민
총화가 당시 이 민족 미래의 장도를 가능하게 하는 이념으로서 고양되던 시대적 흐름 안에서, 한국 교회 역시 사회 안에 발생하는 일들에 대하여
교회와 사회가 함께 공동 대응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74년 한 교계신문의 사설은 ‘청소년 범죄의 새 이해’라는
제하에서 가정ㆍ학교ㆍ교회의 새 공동 대책 추진을 그 대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청소년 범죄라는 사회의 문제는 가정과 학교와 더불어 교회가 함께
대처해야 할 공동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후자의 경우, 사회에 대한 교회의 자신감 표현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산업화라는 시대적 과제로 세계무대에 등장하려는 찰나였다. 이에 따른 사회 전반의 거대화와 그 영향력의 급강에 한국교회는 다소 위축될 만도
하였건만, 교회는 전혀 그렇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확대되는 사회의 모두를 교회의 정신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교회 안에
충만하였다. 순교자 기념 십자가가 제주도에 우뚝 서, 십자가의 도(道)로써 제주의 우상 타파가 가능하다고 본 것도 이 때요, 예수의 복음을 통해
큰 위로와 소망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한 승려 이현각 씨의 사연이 소개된 것도 이 때였다. 교회는 지역 사회에 앞장 선 기수로서 나타났다. 더
나아가 한국이 세계무대 진출을 서두르던 순간,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이미 세계를 누비며 한국을 빛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119:58)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시대에 왕을 측근에서 모셨던 신하였습니다. 그의 직무는
왕의 가까이에서 술 시중을 드는 것인데, 이런 일은 오늘날로 보면 대통령 비서실장의 직무와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네게 무슨 근심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고향 예루살렘이 황무하여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동족과 형제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슬프다고 말합니다. 이 일로 인해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던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으로 유다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쌓는 대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지위를
선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허물어진 성벽을 재건하여 유대인들, 특히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늘 마귀의 방해가 있듯이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려
할 때에도 방해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부흥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꺼리는 자들 중에 특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이 조직적으로 훼방하고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갖은 협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유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성벽 재건이라는 큰 역사를 이뤄냈고 이윽고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일을 앞장서서
희생적으로 봉사하며 용감하게 해 나갔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새 힘을 얻었으며 용기와 지혜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느헤미야의 신앙과 지도력을 본받아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 때문에 근심하고, 허물어진 성벽을 중건하기 위해 자신이 봉사할 길을 찾아
결심하고 실행한 느헤미야의 섬김의 삶처럼, 분단 상황과 갈등과 타락으로 인해 황무해진 오늘의 한국 사회를 위해 기도하며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근심하며 기도하는 진실한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런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결단하고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제2, 제3의 느헤미야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바로 한국의 느헤미야로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일에 열심이 있는 사람을 구별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려 헌신하게 하소서. 아멘.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려는 때에도 훼방하고 방해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악한 일을
할 때보다 착한 일을 하려 할 때 더욱 방해하는 세력이 극성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느헤미야가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일을 시작하자 산발랏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비롯하여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스돗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군대를 모아서 밤에 습격을 가해
쌓여 가는 성벽을 도로 허물 계획을 세우고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 중에 겁에 질리거나 두려워서 아예 성벽 공사를 포기하고 그만두자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용기를 얻고 마음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성벽 중건을
강행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중건에 동원된 유다 백성들을 두 대로 나누어서 한 대가 일을 하면 다른 한 대는 무장을 하게 하여
훼방자들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파수꾼은 나팔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훼방자들의 기습에 대비하였는데, 만일 저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면
나팔을 불어 그들의 기습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며 밤낮으로 성벽을 재건해 나가자 훼방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발각된 줄 알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싸워 나갈 때 마귀는 두려워서 달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야 할 이 세상에는 악한 마귀들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훼방하려고 지키고 막아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날마다 기도하여 영적으로 새 힘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며 전진, 전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마귀들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는 큰 진전이 이뤄지며 천사들의 합창이 들려오게 될 것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려는 때에도 훼방하고 방해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악한 일을
할 때보다 착한 일을 하려 할 때 더욱 방해하는 세력이 극성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느헤미야가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일을 시작하자 산발랏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비롯하여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스돗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군대를 모아서 밤에 습격을 가해
쌓여 가는 성벽을 도로 허물 계획을 세우고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 중에 겁에 질리거나 두려워서 아예 성벽 공사를 포기하고 그만두자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용기를 얻고 마음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성벽 중건을
강행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중건에 동원된 유다 백성들을 두 대로 나누어서 한 대가 일을 하면 다른 한 대는 무장을 하게 하여
훼방자들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파수꾼은 나팔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훼방자들의 기습에 대비하였는데, 만일 저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면
나팔을 불어 그들의 기습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며 밤낮으로 성벽을 재건해 나가자 훼방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발각된 줄 알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싸워 나갈 때 마귀는 두려워서 달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야 할 이 세상에는 악한 마귀들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훼방하려고 지키고 막아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날마다 기도하여 영적으로 새 힘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며 전진, 전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마귀들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는 큰 진전이 이뤄지며 천사들의 합창이 들려오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 6:9)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원수들의 위협 앞에서 느헤미야가 드린 기도입니다.
느헤미야의 원수들은 집요하고 간교했지만 느헤미야는 원수의 올무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느헤미야와 그의 백성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으려 했고
유대 백성들의 손이 피곤하여져서 성벽 쌓는 일을 멈추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원수들의 계략보다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받을 느헤미야는 어떤 지도자입니까?
첫째, 판단이 빠른 지도자입니다. 무력으로 느헤미야를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은 느헤미야를 한적한 곳으로 유인하려 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만나자.” 느헤미야를 유인해서 해하려는 음모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너희에게 내려가겠느냐?”라고 답하며 유인에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느헤미야는 서둘지 않았습니다. 적의 의도를 잘 분별하였습니다.
둘째, 기도하는 지도자입니다. 유인에
실패한 산발랏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 대한 모반을 꾀한다는 헛소문을 지어서 느헤미야를 위협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담대하게 원수를 대적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성공하는 지도자는 담대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영적 분별력이 있는 지도자입니다. 거짓 예언자
스마야가 뇌물을 받고 거짓을 예언했습니다. 영적인 조언자인 척하면서 거짓 예언으로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고 했습니다. 원수들이 죽이려 하니
성전에 숨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숨지 않겠노라.” 마귀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귀는 분별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넷째, 목표를 성취한 지도자입니다. 예루살렘 안에도 원수에게서 뇌물을 받거나 원수와 혼인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안팎에 있는 원수들의 음모와 방해 속에서도 52일 만에 성벽 공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우리도
환경과 조건을 탓하지 말고 끝까지 목표를 이루기 바랍니다.
이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 12:43)
원수들의 방해와 협박 속에서 예루살렘 성벽을 완성한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크게
즐거워하며 성벽을 봉헌하였습니다. 이들은 봉헌식을 어떻게 진행했습니까?
정성껏 봉헌식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각처에 흩어져 있던
레위인들을 예루살렘에 데려왔습니다. 그들로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결하게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몸을 정결하게 했고, 백성들과 성문과 성벽까지 정결하게 했습니다. 이 정결예식은 옷을 빨고 몸을 씻고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찬송하며 성벽 위를 행진했습니다. 이 봉헌식은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모두 동참하는
감격적인 행사였습니다. 백성들과 찬양대를 두 무리로 나누어 한 무리는 에스라가 인도하여 오른쪽으로 돌고 다른 무리는 느헤미야가 인도하여
반대쪽으로 돌았습니다. 성전 부근에서 만나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예스라히야 감독 하에 찬양대가 찬송했습니다. 예배 공동체가
힘을 합하여 힘차게 찬송하며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이 봉헌식은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녀와 어린 아이들도 즐거워하였습니다.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물결은 특정 지역과 공동체를 넘어서 멀리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참된 봉헌 예배 후에는
물질의 헌신이 뒤따랐습니다.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아서 창고에 쌓았습니다.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었고, 그들은 성별된 것을 레위인에게 주었으며, 레위인들은 또 성별하여 제사장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의 예배를 본받아 바른 예배를 드립시다.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주일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함께 힘을 합하여 감사하며
찬송하며 성전에 올라갑시다. 기쁨으로 예배합시다. 우리의 기쁨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멀리멀리 퍼져가게 합시다.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봉헌하는 우리 가족이 됩시다.
우리가 예배할 때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게 하시고 합심하여 즐거움으로 예배하여 그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퍼지게 하옵소서. 아멘.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느 13:9)
성벽을 봉헌한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신앙과 삶을 개혁했습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은 다섯 가지
영역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첫째로, 민족을 성별했습니다. 율법을 따라서 암몬과 모압 자손을 백성 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 양식과 물로 영접하지 않고 저주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이었습니다(1-3절).
둘째로, 원수와 결탁한 지도자를 처벌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암몬 사람
도비야와 혼인 관계를 맺고 그에게 성전의 방을 내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에서 돌아온 후 신속하게 조치하여 도비야의 모든
세간을 밖으로 던져 버리고 하나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들여놓았습니다(4-9절).
셋째로,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성전의
공간 사용과 급료가 바르게 집행되도록 개혁하였습니다. 급료를 받지 못해서 다시 농사지으러 도망간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을 제자리에 세우고,
그 관리를 잘 못한 민장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곡식과 기름과 포도주의 십일조를 잘 관리할 수 있는 충직한 사람들을 책임자로
세웠습니다(10-14절).
넷째로, 안식일을 바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안식일에도 일하고 장사하는 것을 꾸짖고, 성문에는 레위
사람들을 세워 지키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게 하였습니다(15-22절).
마지막으로, 잡혼을 척결했습니다. 딸을 이방인에게 주지
아니하고 이방인의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게 했습니다. 대제사장 손자사위라도 내쫓았습니다(23-31절).
단호하고
신속한 개혁은 느헤미야를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였고 백성들을 바른 신앙과 삶으로 인도했습니다. 제도를 바로 세우고 그 제도를 지켜 나갈 성실한
일꾼을 세우는 것이 바른 개혁입니다. 비판하고 파괴하는 것을 개혁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혁은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은 용서해야 하지만 죄악은 철저하게 단죄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성도의 생활 가운데서 죄가 드러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됨을 유지하고 그 은혜를 얻고자 한다면 불로 태우듯이 죄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죄를 범한 개인들을 단죄함으로 백성
전체를 성결하게 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죄악을 멀리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아멘.
1980년대 전개된 한국 교회의 선교는 그 신학에 있어서 심한 양극화 현상을 노정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보아, 그것은 이른바 ‘복음주의 전도’와 ‘하나님의 선교’의 대립,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대립,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의 대립 양상인 듯 비추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일면 지난 10여년의 한국 교회의 자취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시각에서부터 시발(始發)된 것이기도 하였다. 즉 1980년대의 한국 교회는 회개운동을 필요로 했는데, 그 까닭은 ‘1970년대의
한국 교회가 곧 대회 설계에만 급급하였던 까닭에 오늘은 참된 교회로의 갱신운동이 절실하다’는 풍의 논조가 시대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의 교회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필경 교회의 역사를 자신만의 준거(準據)에서 부정(否定)하는 데 연결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부정당했던 교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참된 교회로 다시 태어나라는 이러한 요구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양분 현상은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참된 교회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비판이었다고 할 때, 자기가 속한 교회나 기관의 대사회적 표출로서 이루어지는 선교신학의 양분과 자기만의 정당성 주장에서 오는 선교신학 양분의
공고화(鞏固化) 그 깊은 골짜기 역시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그 조직과 신학에 있어서 크게 양분된 듯 보였다.
구체적으로 이른바 기성교회와 에큐메니칼운동 기관의 여정이 다소 대립적 요소들로 채워졌으며, 기성교회의 사랑은 에큐메니칼운동의 정의(正義)를
배제하는 듯 보였다. 또한 한국 교회의 거대한 양적 성장은 그 질적 미숙의 다른 이름처럼 얘기되는 한편, 사회 구원을 외치는 목소리는 내적
경건을 결여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한국 교회 양분 위기의 틈을 타고 의심을 받을 만한 경건의 기류들이 한국 교회
대중 속으로 스며들어 한국 교회를 위협하였으며, 교계 일각에서는 성은(聖恩)의 신비로움 상실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이 당시 한국 교회의
단면이었다. 이때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사회의 존경이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지탄받기까지 하였다.
사람이 어떤 뜻을 품고 사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뜻’이란 무엇입니까? 둘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일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여 비전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동적 힘, 곧 추진에너지와 같습니다.
또 하나는 어떤 일에 대하여 근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못함이나 정도를 넘는 일에 대하여 절제하고 조절하게 하는 힘, 곧 콘트롤 에너지와
같습니다. 사람은 사람다운 뜻을, 크리스천은 크리스천다운 뜻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라의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기 위한 선한 도구로 왕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아울러
충성된 종들을 세워 일하게 하시는 은혜를 고백하고 찬양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3차례에 걸쳐 포로가
되었고, 하나님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해방되어, 역시 3차례에 결쳐 귀환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짓밟히고,
더럽혀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품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리라는 서원이요, 이교도들에게 짓밟힌 거룩한 땅을 정화시키리라는 결심이요, 신앙적으로 세속화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개혁하리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 후 무너졌던 제단은 스룹바벨에 의해 새롭게 세워졌고, 에스라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새롭게 개혁되었으며, 느헤미야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은 새롭게 수축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하려던 그 거룩한 뜻이 말씀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뜻을 품었는지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또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도록 거룩한 뜻을 품어야 합니다. 부디 거룩하고 아름다운 뜻을 품어 그 뜻을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옛 성도들의 마음에 거룩한 뜻을 품게 하시어 예루살렘 성전을 아름답게 하신 하나님, 이제
우리의 마음에도 거룩한 뜻을 품게 하시어 우리 교회를 아름답게 섬기게 하옵소서. 아멘.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스 9:5)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이것은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 에스라의 모습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이끌고 귀국한 지도자 에스라가 예루살렘의 타락한 현실을 보고, 울며 통곡하는 모습입니다. 먼저 귀환한 백성들이 영ㆍ육간 저급한
생활에 빠져 있음을 보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 곧 ‘남겨두어 피하게 하신’이른바 남은 자(remnants)의 은혜를 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앙적ㆍ윤리적 기강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이방인들과 섞여 살면서 우상숭배의 죄는 물론 통혼의 죄를 거듭하였고 신앙적 유일성과
선민으로서의 거룩성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또한 포로에서 귀환 후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라는 큰 사명을 받았으나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일에 지도자들, 곧 방백들과 두목들이 앞장서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위기였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문제를 놓고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조국과 민족 그리고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늘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걱정스러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아주 캄캄한 밤중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상황보다도 더 심각합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긴급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오직 에스라처럼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새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엘리야처럼(왕상 18:42) ‘땅에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다니엘처럼(단 6:10)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예수님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오늘 우리는 무릎을 꿇었는지요? 오늘 나는, 오늘 우리는 손을 들었는지요? 부디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기도하는 에스라의 모습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의 모습은 죄가 많고 허물이 커서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나이다. 우리 믿는
이들이 무릎 꿇고 손을 들고 기도하여 새 은혜를 받게 하옵소서. 아멘.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스 10:11)
오늘은 행동하는 지도자 에스라의 개혁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가 자기의 죄가 아닌 백성들의 죄를 위해 회개하고 또한 자기가 먼저 회개하였을 때, 백성들이 따라 회개함을
주목해야 합니다. 영성, 신분, 학식, 덕망, 경제력이 뛰어나고 왕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가 이렇게
솔선수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이에 백성들도 회개에 동참하였고, 마침내 잃었던 은혜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철저한 개혁자의 모습입니다. 먼저 이방인 아내와 그 소생들을 다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총회를
소집하였는데, 이에 따르지 않는 자는 제명조치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처사가 아니라 죄에서의 분리, 곧 거룩하게 구별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18-44절의 범죄자들의 명단을 보면 제사장, 레위인, 평민 순으로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 먼저 묻고 있습니다.
아주 철저하되 정당한 개혁자의 모습입니다. 개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픔이 있고, 불이익이 따르고, 선의의 피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15절에는 이런 개혁이 너무 지나치다고 항변하는 네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적 상황이 심각한 위기상황이었기에 철저한
개혁운동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셋째, 개혁의 중심주제가 신앙회복에 있음을 잊지 않는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개혁은 말씀회복 운동,
예배회복 운동, 회개 운동 등 영적 개혁이었습니다. 그리고 생활개혁 운동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죄’인 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엡 4:22-24) 새생활 운동이었습니다. 이 결과 이스라엘은 마침내 하나님의 선민으로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느 때보다도 신앙과 생활의 개혁이 절실한 때입니다. 교회가 먼저, 지도자가 먼저 개혁에 앞장서야 합니다. 부디 내가
먼저, 우리가 먼저 신앙개혁과 생활개혁에 모범을 보이십시다.
자기에게는 관대하나 남에게는 가혹한 사람들,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하는 이 시대를 불쌍히
여기사,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가 철저히 개혁되게 하옵소서. 아멘.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 9:1-2)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역설적인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팔복의 두 번째 항목인
‘애통하는 자의 복’은 우리의 논리와 상식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애통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죄에 대한 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의 역사를 맛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에 대한 애통함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기쁨과 위로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성숙한 자입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거울에 비친 자기 죄를 보고
애통하는 자입니다. 이 애통함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만이 성숙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는 애통함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많은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감옥에 갑니다. 그런데 이들 중
51%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억울하다고 변명합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애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진정 이 시대는
정치적인 것부터 개인의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죄의 고백과 애통함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청산되지 않는 죄는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과거 역사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죄를 애통했습니다. 애통함을 통하여 부끄러운 과거를 씻고 새날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물질의 소유만을 복으로 생각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 따라 날마다 죄를 자복하고 애통하는 삶을
삽시다. 그럴 때 주님의 한없는 자비와 용서의 기쁨이 넘쳐 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애통하며 흘린 눈물은 영혼의 진주가 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가슴을 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린 세리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느 9:31)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의 수업은 독특했습니다. 먼저 문장 형식을 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영어 문장에서 주어를 찾아 빨간 펜으로 칠하라고 했습니다. 문장에서 주어만 찾으면 그 외의 동사, 보어, 목적어를 쉽게 찾아 문장을 빨리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모든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입니다. 주어가 없으면 문장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동사나 목적어도 빛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동사나 목적어가 화려해도 주어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의
문장에서 주어를 찾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주어에 맞게 동사, 목적어, 보어인 우리의 역할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과
신앙에서는 언제나 주님이 주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님을 주어로 삼고 주님이 하신 일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이러한 믿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5절에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의
시작과 끝을 주님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셨는가를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언제나 주님을 주어로 찾고 섬겨야 합니다. 주님이 지난날 베풀어 주신 역사를 바르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주님을
주인 삼고 사는 가운데 주님의 나라와 의의 동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어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안에 주어로 자리잡은 우리 자신 대신 주님을 인생의 문장의 주어로 찾읍시다. 그러면 주님이 하신 일들이 선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한층 더 밝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우리 자신의 인생을 위하여 한 일들보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과 마음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느 8:6)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현자가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자연과
우주를 만드실 때마다 좋았더라 하셨는데 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만드신 후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습니까?” 이 물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은 완성품이 아니고 미완성의 존재로서 이제부터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에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완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을 통해서 ‘심히 좋았더라’는 감탄사를 들을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목표를 위하여 오늘도 달려 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의 기쁨의 존재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사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자 에스라
선지자를 통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들은 변화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어떻게 말씀을 들었는지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마음을 열고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율법 듣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둘째,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학자 에스라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을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멘을
외치면서 받았습니다. 셋째, 행할 바를 찾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들이 지켜야 할 초막절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초막절을 위하여 초막을 짓고 절기를 다시 지켰습니다. 넷째,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아멘으로, 은혜를 찾는 자세로 그리고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정금과 같이 새로워지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선교신학의 양극화로 그 골이 깊어만 가던 1980년대 한국 교회에서 중도와 관용의 정신을
견지하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다. 이들 나름의 견해와 원칙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힘주어 기독교의 원리와 원칙을 강조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들은 현실 도피와 세속에로의 동화는 아울러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가치관이 전도(顚倒)된 이 세계의 모순을
한탄하고, 세계의 정상(正常)을 회복하려면 묻어 버린 우리의 뿌리를 다시 파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바치는 희망의
소리로서 선포되었다.
한편 1980년대 한국 교회 안에 나타난 교계 일각의 자성의 소리와 중도와 관용의 정신 주장은 교회 활동의
반경에 대한 흔들림 없는 원칙 확립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는 역사 내에 주어진 경계를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인식이 그것이다. 즉,
교회는 교회로서의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선 교회는 활동의 반경에서 역사적 제한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북한 선교를
인내하며 준비하되 이 교회가 소속된 나라의 국익과 안보에 해(害)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하나이다.
나아가 교회는 활동의 원리에서 역사적 제한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가 그 역사 개혁과 혁신의 길에서 근거와 척도로
삼을 활동 원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라고 보았다.
한편 교회 활동에 대한 이러한 원칙 확립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신들과 다른 입장들에 대해서도 중도와 관용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던 가능성은 앞서 말한바 자기 정계(定界)의 유한성 자각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입지가 한정된 것이며 또 자신이 고유한 것처럼 동일하게 고유한 다른 정계들이 이 역사 안에 함께 펼쳐진다는 견지에서
자신의 정계성은 곧 다른 것들과의 상보성(相補性)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여기서 상호 공존의 중도와 관용의 폭이 존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정계성과 상보성의 인정은 이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 섭리되고 인간은 그분이 보내 주신바 각자의 구역에서
맡은바 사명을 감당한다는 역사인식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전도서의 말씀이 여기 새롭게 들린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모든 극단을 피할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욜
3:17)
요엘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의 ‘여호와의 날’에 관해 말씀하는 책입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요엘서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팔레스틴 땅에 임한 자연적인 메뚜기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의 예표가 됨을 말하는
부분과(1:1-2:17), 한편 장차 임할 여호와의 날에 회개하고 돌아오면 오히려 구원의 날이 될 것을 말씀하는 부분입니다(2:18-3:21).
이방은 하나님의 백성을 잔혹하게 취급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유린하고 그 땅을 약탈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흩어집니다.
강제로 이방에 끌려가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소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을 약탈하여 부요케 된 자들을 그 소유로 타락하게 만듭니다. 타인에게 탈취한 부와 명예는 자기에게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도 박해를 당하여 이방에 흩어져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만국을 모아 사면의 원수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시고 심판 장소는 여호사밧 골짜기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업인 백성을 압제하고 괴롭히고 약탈하여 망쳐 놓은 자들을
심판하시고 소중한 백성에게는 신원의 날을 허락하시고 살려내시며 복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무릇 너희를 범한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한
것”이라 하시고(슥 2:8), 또 “너희가 여기 내 형제들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시며 이스라엘의 대적자를
경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대적한 자들은 파멸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은
반드시 행위대로 심판하시며 당신의 택한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보호하고 구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에게는 멸망의 날이 되지만
의로운 자들에게는 기쁨과 소망의 날이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할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역경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
1:7)
나훔서는 요나와 함께 니느웨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데,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를 촉구했다면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요나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심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나 나훔 시대에 니느웨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이전보다 더 교만하고 사악하여 더 이상은
하나님의 공의가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훔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국가의 주가 되심과 불의한 국가와 부패한 백성은 반드시 패망하게
됨을 보여 줍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나 죄에 대해서는 심판하시는 분임을 증거하였고, 니느웨가 멸망한 원인이 그들의 죄에
있음을 말해 주며 그로 인해 요나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니느웨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것이며 자기 백성을 신원해 주시는 은혜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일찍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훔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인내와 긍휼로 범죄한 자기 백성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을 베푸시는 행위를
묘사한 것입니다.
나훔이 유대인에게 전한 아름다운 소식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말한 것으로 사도
바울이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훔은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했는데, 그것은 장차 재림하시어 만국을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속여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에 출입하면서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믿지 않고 그저 현실의 탐욕의 노예로 사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우리 모두 참 신앙에 있지 않음을 자성해야 할 때입니다. 나훔 예언자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영생
천국과 지옥의 고통을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 진지해지고 우리 사회가 믿는 자들로 인해 더 밝고 명랑한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고 순종하여 더 맑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옵
1:21)
나훔이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하박국 선지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였다면 오바댜는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였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자손으로, 이스라엘과는 근친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에돔을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명령을 준수했으나 에돔은 늘 선민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욕하고 이스라엘의 보화를 노략질하고, 피난자를
참살하거나 적에게 넘겨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형벌의 날에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것처럼 보응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지라”고 하셨고,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오바댜는 이스라엘과 그 기업의 회복을 말씀하고 에돔의 운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위하여 에돔의 형벌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했을 때 징벌을 받는다면 이방인 된 에돔이야
더욱 진노의 잔을 받지 않겠습니까? 15절의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란 예수께서 재림해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예표일 것입니다.
전반부에서 에돔의 멸망을 말했다면 후반부는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오바댜는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민족에게 임하지만
시온산은 구원을 받고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각처에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하고 있으나 곧 회복될 것이며 그때 메시야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에돔은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이 지금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인내하고 기도생활에 정진하면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오래 진노하지 않으십니다. 교회를 향한 징계는 반드시 치유와 축복이
함께합니다. 이 세상 끝날에는 예수께서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우리를 불러들일 것입니다. 이 땅에서 고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노래하는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습 3:12)
라마단(회교력으로 제9월)에 일출부터 일몰까지 금식하고, 메카(회교도의 성지)를 찾아
순례하는 구름같이 많은 회교도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사월 초파일마다 산 속이나 도심의 절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모습도 보셨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인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행렬입니다. 세상에는 도도한 우상의 물결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상의 바다 한복판에 외롭게
떠 있는 배 한 척과 같은 모습이 우리들 기독자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신앙행위를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우상숭배는 매우 자연스러운 세상의 모습이지만, 우리 기독자들에게는 위협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서느냐 넘어지느냐를
결정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번째 말씀은, 신앙의 첫 단계이자 전부일 수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살던 시대의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돌볼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선지자들까지도 우상숭배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자들은 돌이나 쇠로 만든 어떤 형상을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통칭해서
우상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 현상을 우리들 삶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식이 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되지 않으면 결국
우상숭배의 삶을 살게 됩니다. 스바냐는 이런 혼동의 시대에 외롭게 남은 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러갈지라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수 24:15)고 분명히 말했던 여호수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쭙고 따르는 남은 자가 되도록
합시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스 3:12)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정말 힘들면서도 또한 감격적인 일입니다. 예루살렘 귀환이 있던 해
칠월에 예수아와 제사장들과 스룹바벨 등이 모여 솔로몬 성전의 제단이 있던 자리에 새로 단을 만들어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번제를 드리다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번제단은 회복되고 번제는 다시 드려졌지만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파괴된 성전이 아직 재건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귀환한 지도자들은 성전을 다시 짓기로 하고 재료를 준비해 귀향민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약
1년 만에 성전의 주춧돌을 놓고 성전의 지대(기초)를 완성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성전 기초를 놓는 정초식 장면을 묘사합니다.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인들은 제금을 들고 여호와를 찬송했으며 서로 찬송으로 화답하니 그 모습을 보던 백성들도 역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바로 이때 백성들 가운데 대성통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백성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기뻐 찬송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광경 아닙니까? 대성통곡을 한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나이가 많아 첫
성전(솔로몬 성전)을 본 적이 있던 노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새로이 재건될 성전의 기초를 보니 약 50년 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될
때의 그 비참한 기억이 떠올라서 통곡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성전기초가 예루살렘 첫 성전의 그 영화로움과 비교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에
서러운 마음에 운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은 종종 있습니다. 수십 억, 수백 억 들여 지은 화려한 성전에 비해 우리
교회의 성전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서러울 수도 있습니다. 오래 된 시골교회나 지하상가에 세든 개척교회는 더욱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으리으리한
건물이나 화려한 외형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작고 초라해 보이는 교회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피 흘려 세우신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자체만으로도 우리
교회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내 교회를 사랑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좋은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임을
잊지 맙시다. 성도들이 교회에 자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때 그 교회는 참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참으로 사랑하며, 우리 교회에 자부심을 갖게 하시고, 또한 우리 교회를 자랑하여
떳떳하게 전도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