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ㆍ제 목 : |
호머 헐버트 H. B. Hulbert, 1863-1949, 미북감리회 |
|
|
|
ㆍ날 짜 : 2008-01-06 Sun.
Prev Next |
ㆍ조회수 : 4,512
|
|
|
|
[묵상내용]
‘아리랑’은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서도 가장 상징적인 노래입니다. 그런데 구전으로 전해오던 아리랑이 가사와 함께 악보에 실리게 된 것은 푸른 눈의 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를 통해서였습니다. 헐버트는 참으로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자 했던 서양선교사였습니다. 한국민족의 기원, 언어, 풍습, 기질, 역사 등을 연구한 그의 많은 논문들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료인 동시에, 한국을 사랑했던 그의 마음이 배어있는 글들입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에 있는 그의 묘 앞에 서서 비문을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합니다. “비전의 사람, 한국의 친구(A Man of Vision and Friend of Korea).”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o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 주 회중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 인도선교사였던 외할아버지를 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자연스레 1884년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하였을 무렵, 한국정부는 국립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그 교사를 미국국무성에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을까요? 당시 헐버트의 부친과 동창이었던 국무성장관의 요청에, 형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헐버트가 교사로 선발되어 1886년 7월 4일 내한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던 중, 1891년 육영공원 축소의 문제로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1893년 목사안수를 받고 미감리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돌아와, 〈삼문출판사〉 운영의 책임을 지고 문서선교를 주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결코 문필활동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용기있는 행동으로 옮겼던 진정한 ‘한국인의 친구’였습니다.
우리나라 〈YMCA〉의 초대 회장으로서 한국의 청년들을 위해 헌신하였고,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자, 「The Korea Review」를 통해 일본의 야만적 탄압행위를 폭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고종에게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면서, 「회의시보(Courier de la Confere´nce)」에 한국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하였습니다. 결국 밀사사건으로 한국에서 추방을 당해 유럽 각지를 방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그 지극한 사랑은 오늘 우리의 마음을 더욱 울립니다. 비전의 사람, 한국의 친구 헐버트! 그는 58년 전 자신의 유언대로 그의 사랑,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 |
|
|
|
|

※ 로그인한 사람에게만 덧글쓰기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로그인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