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사 24:15)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잘
알려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우선 심판의 긍정적인 면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평가해 준다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 신뢰할 수 있는 분에게 삶을 평가받는다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그 평가 내용이 어떠하든, 설령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정리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일입니다. 또한 이런 평가가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심판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면서(마
25:31-46)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판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 7:21-23).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으니, 천국의 좋은 자리를 확보해 두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남은 자’들을 주목하게 합니다. 남은 자들이 ‘바다로부터’ 그리고
‘동방에서’, 또한 ‘땅 끝에서’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남은 자들은 변방의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중심에서 제외된 사람들로,
주목받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남은 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중국에서 활발하게 선교
영역을 넓히고 있는 조선족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강제로 만주 땅에 이주된 조선족의 후예로, 남의 땅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소수민족인 조선족을 통해서 13억의 중국 인민들을 구원하라는 ‘남은 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중요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300여 개의 작은 교회들을
돌보며, 교회의 일꾼들을 양육하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남은 자’를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인간 역사에서 어둡거나 절망적이지 않았던 때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역사는
언제나 어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오늘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그런 희망의 말씀을 읽게 됩니다.
첫째로 미가 선지자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7-13절).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여전히 문제투성이뿐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고, 실패는 거듭되며,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8절). 그뿐 아니라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할 두려움마저 있습니다(9절). 그러나 선지자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욱 뚜렷이 구원의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그 얼굴빛을 돌리고 계셨던 것입니다(민
6:25-26).
둘째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14-17절). 기도는 우리의 희망사항을 하나님께 알리는 일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총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친히 목자장이 되셔서 자기 양떼를 먹이고 인도하셨던 시절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산에서 풍족한 삶을 누린 일과, 길르앗의 넓은 들에서 많은 육축을 먹인 일(신 3:12-19)이며, 무엇보다도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던 수많은 기적들을 회상하는 일입니다. 기도가 힘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낱낱이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18-20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려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아무런 자격도 가치도 없는 인생에게 분에 넘치도록 은총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 찬양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희망의 말씀을 먹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소생시키는 능력이십니다. 아멘.
이른바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시작된 1990년대의 한국 교회는 때를 같이한 통일독일의 출현과
공산권의 몰락이라는 세계적 현상도 있고 해서 이념의 논쟁과 혹 그에 영향 받았을 신학적 대립에서는 다소 떠난 듯 보였다. 그 대신 새로운
기풍들이 한국 교회를 채워갔다.
첫째, 한국 교회는 이 시기에 신앙인은 다 각각 신앙 때문에 갖는 신부(神賦)의 사명이 있으며
그것을 지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무엇을 얻기 위한 유도(誘導)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 그 자체로서의 신앙에 한국 교회가 눈 떠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경향이 강했던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는 무엇을 얻기 위한, 즉 구원 받기 위한 혹은 사회 개혁의 실현을 위한
유도로서의 차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기독교는 기독교 그 자체 때문에 신앙되기 시작한다. 역사 안의 내 생명은 역사적 사명의
신부(神賦) 의식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이 이때 나타난다.
둘째, 세상의 변화는 오히려 하나님 경륜 안에 연결된 나 자신의 사명
수행과 태도의 변화 그리고 회개에서 가능하다는 인식이 1990년대 한국 교회의 시대적 확신으로 자리잡아 갔다. 한국 교회의 교세 성장 둔화의
책임은 다름 아닌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자신의 삶에 있음을 이 시대의 교회는 회개하였다. 따라서 교세 회복은 세계 선교의 밀알이 되리라는
다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셋째, 이때 교회는 한국 교회의 역사 안에 주어진 신부의 사명 수행과 태도 변화의 활력을 유독 과거
역사가 주는 계시에서 찾고 있었다. 세계 교회 역사 탐방, 신앙 선배들에 대한 회고담, 한국 교회의 뿌리 찾기 등이 이 시대 한국 교회의
화두였다. 또한 세계 교회의 전통도 함께 강조되었음은 때를 같이한 교회력의 강조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샘물은 사막에 흐르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도 살구꽃이 피어났다. 사막이나 마른 지팡이와 같이 언뜻 죽은 것으로 보이는 역사는 실제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샘물과
살구꽃 같은 계시를 이 현재에 내보여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간직한 이로 하여금 미래의 전도를 밝히 비추게 할 수 있음을 한국 교회는 이날
투시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사과 농사를 짓는 아버지가 가을에 사과를 판 날, 그 돈을 다 집어 들고
밤중에 가출을 했습니다. 도시에 나가서 성공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십 년만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도시에서는 더 이상 살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죽어 버리자’ 하고 마음을 먹었지만,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한 번이라도 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버님, 제가 이제 집에 돌아갈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도 한 번 뵙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그저 한 번 얼굴 뵙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기찻길 옆에 있는 우리 집 과수원 사과나무에
흰 이불보를 한 장 널어 주십시오.>
편지를 보낸 후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약에 흰
이불보가 널려 있지 않으면 과수원을 지나자마자 있는 강 철교에서 뛰어내려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수원 옆을 지나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요? 과수원의 사과나무 수백 그루에 흰 이불보, 요, 옷가지가 묶여서 너울거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하나만 걸어 놓으면 아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갈까 봐 부모님이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흰 천으로 된 것은 다 구해다가 과수원에 걸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성공하고 잘 되면 부모는 은근히 자랑스럽고 마음이 뿌듯합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되어도 부모 마음에는
그 자식이 더 측은하고 안타깝습니다. 재산을 들고 가출했어도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가 됩니다.
악한 사람이라도 제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물며 선하고 좋으신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야 무엇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 장의
흰 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이 사람을 보라.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이다”(롬
5:8)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사랑하셔서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눈같이, 양털같이 희게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 사죄함과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앞에 서기에 심히 부족한 죄인을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을
받은 백성답게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아멘.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사 1:25)
갓 태어난 아기의 사진과 10년, 20년 뒤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굴 모습이나 자태가 자라는 환경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 때문입니다. 얼굴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다가
가난해지기도 하고, 몸이 건강했다가 병 들기도 하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겪으면서 몇 번이나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변하는 것이 연약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전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가 의심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님을
모독했던 사람이 주님의 큰 일꾼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병에 걸리거나 가난해지는 것은 무슨 노력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부자가 되거나 건강해지는 것처럼 나쁜 쪽에서 좋은 쪽으로 바뀌는 것은 의식적으로 노력을 많이 해야 됩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과거에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데 웃시야 왕 때부터 하나님께 죄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시라는 영광을 받았던 곳에 이제는 범죄자들이 날뛰고, 고급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고아처럼 힘 없고 약한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순은이나 순수한 포도주가 아니라 찌꺼기 잡탕같이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손을 대십니다. 찌꺼기는 잿물에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고, 혼잡물은 다
없애 버리고 처음과 같이 회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처음 믿음,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능력이 있으셔도 우리가 그것을
담을 거룩함과 경건이라는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 발에서 더러운 신을 벗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죄악은 이제 벗어 버립시다. 옛사람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새로워지고 거듭나야
합니다.
물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훈련을 받으며 우리의 가치관과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크게 번성하고 창대하게 사는 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거룩함을 회복하여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사
2:4)
올해의 국내외 10대 뉴스를 선정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손꼽겠습니까? 매년 조금씩 다르지만
그래도 어느 해나 전쟁과 자연재해, 정치적인 격변을 가져온 사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사건들은 서로 다투고 힘으로 억누르고 억압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또한 이런 와중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고통받고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받는 치욕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먼 하늘에 계시면서 세상의 일은 모른 척 초연하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개입하시고, 섭리하시고, 임재하십니다.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진실을 되살리고,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거두어 내십니다. 역사를 바꾸고,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새 일을 행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결하여 공의를
세우십니다. 또 그 동안 사람들을 베고, 상하게 하고, 죽였던 칼을 녹여서 그것을 농사짓는 보습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사람을 찌르고 피흘리게
만들었던 창을 쳐서 곡식을 거두는 낫으로 만드십니다. 전쟁과 거짓이 난무하는 이 세계에 평화와 공의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공의와 평화로 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고, 헤롯 왕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다 죽이는 집단 살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승리했습니까? 권력을 악용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하나님의 개입을 거부했던 헤롯이 누구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총칼과 폭력이 강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평화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악이 잠시는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승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 행동하시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기쁜 소식에 귀 기울입시다.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들 가운데 평화의 왕이 탄생하고, 금방 멸망할 것 같은 오늘 이 세계에 공의의 왕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10대 뉴스를 넘어서는
올해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과 인생, 역사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 화평이 넘쳐나는 삶과 세계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세상을 평화와 공의로 바꾸어 놓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인생과 역사 속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하옵소서. 아멘.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
2:22)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온 세상의 모범이 되는 믿음을 갖기 원하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파멸 직전의 비참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궁극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이방인과 언약을 맺고 정치ㆍ경제ㆍ종교적으로 교류했습니다(6절). 그들은 우상숭배의 생활 습관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기보다는 경제력과 군사력만 믿고 교만했습니다(7절). 세속의 힘과 군사력을 의지했습니다. 또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각종 우상을
의뢰했습니다(8,9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각종 부정한 것들이 이스라엘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남유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탐심에 빠졌습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여호와께서 싫어하시는 죄악들을 서슴치 않고
범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장차 ‘여호와의 날’, 여호와께서 죄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이 허물어집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높임을 받게 됩니다. 그날은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땅굴에
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먼저 이사야 2장
5절은 우리에게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하십니다. 참 진리이신 여호와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모든 죄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둠이 가득해도 빛이 들어오면 밝아지는 것처럼 진리의 빛에 거함으로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사야 2장 22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여호와의 날은 멸망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요, 소망의 날이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몰아내게 하여 주옵소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사 3:5)
질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약속이며, 서로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
필요한 의무사항입니다. 질서가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해지고 기본적인 도덕관념이 깨져 버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과 사람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바르게 하려면 질서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고 인정하고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질서 있는 관계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그 관계의 우선성 때문에 모든 문제가 잘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상실한 사람들의
특징적인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이들의 삶에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는 질서입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신 바른 질서가 깨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사람들과의 도덕적인 질서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되자 서로 존경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이 적대적인 관계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서로 학대하고 잔해한다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잃어 버리면 공격적인 인간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잃어버리자 그 가정은 공격적인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공격적인 가정이 가진 삶의 태도가 인류에게 엄청난 죄를 가져오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질서의
관계,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창조의 질서를 지켜 가게 하옵소서. 아멘.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사 4:2)
작년 9월 체코에서 열린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은·동메달을
목에 건 김진호 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진호 군이 4살 때 발달장애 자폐증 판정을 받은 후부터 진호 군의 가정은 험난한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유현경 씨가 그 무렵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첫 예배 때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유씨는 진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처음 마음을 버리고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마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 5학년 때, 메마른 땅과 같았던 진호에게 소망의 싹이 피었습니다. 교내 수영반에
들어간 진호는 수영장을 찾을 때마다 평소와 다르게 활기와 자신감을 보였고, 이후로 진호는 목적과 방향이 정확한 삶을 살면서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체코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말씀을 읽는 진호의 모습은 그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날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날’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이스라엘 멸망의
날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날’이 단순히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아니라 여호와의 싹이 나는 소망의 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은
멸망하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한 아름답고 영화로운 싹을 통해 맺어진 열매는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의 자랑과 영광이 될 것이라고, 남은 자들 모두
거룩하다 칭함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죄의 더러움을 씻기시고 땅을 청결케 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죄인인 우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소망이 없었던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심으로,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좋은 열매를 맺고, 이 땅을 회복시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 삶 가운데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경술국치의 한일합방으로 한국은 나라를 잃었다.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흩어졌다. 그러나
그때에도 땅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교회는 보았다. 국토의 신앙, 하나님 주신 땅에 대한 찬양과 고백이 일제하 한국 교회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애국가가 그때 등장한다. 감리교인 윤치호(尹致昊)의 작시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감격으로 부른 노래가 울려 퍼질 때마다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되새기는 겨레의 가슴은 터질 듯
부풀었다.
삼일운동 직후이다. 무궁화 선생으로 알려진 남궁억(南宮檍)은 이 땅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금수강산임을 알았다. 일제의
탄압은 삼일운동이 끝난 후에 더욱 거세지고 문화통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의주의와 세속화의 격랑이 강타했던 그때 하늘을 향해 솟구친 그의
찬송은 맑고도 선명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렇게 노래한 그는 감격에 겨워 한 번 더 부르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하고 노래한다.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그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그리고 다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불렀다. 불러도 불러도 다시 부르고픈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동산이며 주님께서 일하라고 이
겨레를 부르시는 아름다운 땅이라는 고백이었다.
일제 침략의 발길이 다가섰던 1900년에 이미 “이제 다가올 세기, 서기 2000년의
조선은 발전과 개선을 거듭하여 오늘의 조선과 비교해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 아, 이 조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100년 후의
그날 내 다시 조선에 되돌아오고 싶구나” 꿈꾸었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제하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거기에 빠질 것이라 (사 5:14)
자비로운 부모는 걱정이 많습니다. 특별히 자녀의 앞날을 생각하여 한 시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잔소리 많은 부모로 낙인 찍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체질이 그래서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사야가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위태한 지경에서도
자리를 정하지 못한 어리석은 백성입니다. 넉넉한 재물이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집을 늘리는 일이 최고의 일이고,
밭을 늘려가는 일이 생명을 지키는 일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집들이 황폐해질 것이고 흉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거기에 살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연회를 열고 소고와 비파, 수금을 연주하며 춤을 추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잔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께서 하시는 일에 관심이 없으니 영화를 누린들 얼마나 길겠으며, 주께서 하시는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의 말로가 어떻겠습니까?
본문에서 오늘 우리의 형편을 보는 것 같아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재물을 쌓는 것, 집을
늘리고 땅을 늘리는 것이 성공적인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알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우리의 삶을 보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포도주가 넉넉한
것만으로 기뻐하여 비파와 수금을 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우리의 집을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노하심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교만한 자들을 엎으시고 귀한 자들을 비천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폐허가 된 좋은 집터에서 어린 양이 풀을 뜯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멸망받은 부자들의 밭에서 다른
사람들이 곡식을 얻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귀영화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심판의 날을 기억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화려한 인생을 즐기다가 어려운 이웃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아멘.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사 5:19)
세계여행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땅도 넓지 않고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한국이 이렇게 잘 살 수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남북이 대치해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는 나라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형편이나 조건으로 봐서는 그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이 잘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한국인의 부정적인 성격이 그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한국인의 ‘조급증’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소위 ‘빨리빨리’로 표현되는 한국인의 성격은 한국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조급증이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고 원하는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최고의 봉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교민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수도가 고장나서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닌데 미국인 기술자를 부르면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설계도 들여다보고, 지질 조사하고, 과학적으로 처리결과를 예측해야만 공사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한국인 기술자는 설계도 없이 감으로 모든 것을 처리합니다. 망치로 몇 군데 두드려 보면 압니다. 바로
뜯어내고 고쳐 줍니다. 물론 시행착오가 많습니다. 그러나 땅은 좁고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는 이렇게 신속하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 기술을 요하는 세상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독촉하거나 서둘러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기준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멈추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이 선하다고 해서 선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악한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사람,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자기를 믿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취하여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지혜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하나님보다 나를 믿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부족함이 없게 하시옵소서. 아멘.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 6:8)
필요한 사람을 뽑을 때 우리는 심사숙고합니다. 살펴보고 다시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력서를 쓰기도 하고 신원 보증서를 만들기도 합니다. 추천서를 써서 소개하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을 뽑기도
어렵고 뽑히기도 어렵습니다. 혹시 최선을 다해 사람을 선발했다 해도 그것이 최선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그런 점에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얼굴을 보거나 경력을 보지 않습니다.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다릅니다.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이 많아도 하나님께는 자랑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일꾼을 뽑으시되 해야 할 일, 맡겨야 할 일만
정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뽑으시되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했습니다.
사람의 한계를 아시는
하나님 그리고 사람에게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뽑으시되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삼고자 먼저 그 입술을 불로
다스리셨습니다. 부정한 입술이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하시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뽑힘을 받은 이사야는 온전히 하나님의 종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무서운 줄 알았습니다. 온전히 몸을 바치는 헌신도 택함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택함받은 사람들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수고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은 심판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때에 관해 예고하고 준비하도록 돕는 정도입니다. 날마다 깨어 기도하도록 돕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끝없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귀에 들려지게 하는 일이 뽑힘받은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언어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의 수단이 뽑힘받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은총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도록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사람 앞에서 전파합니다.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더 큰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 베가 왕이 이웃 나라 아람 왕 르신과 동맹을 맺고 남유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상황입니다. 2절 말씀에,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하스 왕은 그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다고 합니다. 두렵고 겁에 질린 모습입니다. 이렇게 두렵고 떨릴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타다가
만 두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에 지나지 않으니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일러라.”
사람의 눈에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타다가 만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와 같이 입으로 불기만 해도 없어져 버리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는 두려워하고 겁을 냅니까? 힘들고 위험할 때, 고통이 다가올 때, 우리는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지 못하고 그 문제 자체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또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않으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100% 하나님을 신뢰하고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두렵고 염려가 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날마다 기뻐하며 승리의 함성을 지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죄에서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탄 배에 광풍이 불어 배에 물이 가득하였을 때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고 말씀하시니 광풍과 파도가 다 잠잠해졌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두려움이요 걱정이지만,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평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굳게 서서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합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해결자이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굳게 서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3)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실수도 하고, 죄도 짓고, 잘못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할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초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감사하고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음에 굳건하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택한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3장 3절에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악에서 지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공로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식과 물질을 보시고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실수와 허물을 아시고도 예수님의 보혈로 덮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부족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우리를 책임져 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사 택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살아가는 우리 가 됩시다.
오늘 말씀은 사람과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9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보고 허리를 동이고 허리띠를 띠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방법과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욕심과 욕망으로는 끝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사람의 방법으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승리하는 방법은 10절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12절에서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없고 놀랄 것도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는
13절에서 이스라엘에게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고 권고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지 맙시다.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지 맙시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함과 아픈 마음,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우리의 변호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최고의 은혜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상처받고 사람에게 배신당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위해 일하는 일꾼입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희망이 없는 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지 말게 하시고 오직 우리의 소망이요 모든 것이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아멘.
영국의 역사가 버터필드(H. Butterfield)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곳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일이든지 이미 반쯤은 냉소적인 태도를 굳히고
보는 이들이 있다.” 기독교인의 자세는 어떠한가.
처음 한국 교회에서 찬송가를 편집한 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찬양과 감사는 기독교에만 있다고 보았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곳이요 따라서 창조하신 그분이 섭리하시는
신성한 곳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주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 구원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 세상과 역사이다. 여기서 역사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장소요, 그분의 구원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자각이 없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설령 이해되지 않고 흡족하지 않더라도
거기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고 조화를 추구하고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역사는 온통 하나님의 계시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포착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자신과 자식의 목숨이 가죽부대 하나의 물에 달려 있다고 절망한 나머지
바로 곁에 있는 샘물을 보지 못했던 하갈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범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이 군국주의의 외길로, 절대화의 우상의 길로
치달을 때 김교신(金敎臣)은 고요히 하늘로 눈을 들어 이 땅에 맡겨진 하늘의 사명을 찬양하였다. 1934년 『성서조선』(聖書朝鮮)에 실린 그의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는 이러했다. “낭림산(狼林山) 머리 위에 하늘을 향한 좌완(左腕)을 백두산 저편까지 높이 뻗치고, 장산곶 끝까지
우완(右腕)을 드리워 어루만지려는듯, 우각(右脚)의 태백산은 거제까지 굽혀 올리고, 좌각(左脚)의 소백산은 진도까지 뻗쳐 디딘 듯,
지구대(地溝帶)는 허리가 잘룩하고 금강산은 가슴에 드리운 노리개인 듯, 몸을 가리운 능라(綾羅)가 동풍에 나붓기어 녹색 평야를 이루었으니 엷고도
가볍다. 선녀 바야흐로 구름 위에 소스르치랴는 자태인가, 혹은 자유의 여신이 대륙을 머리 위에 이고 일어서려고 허리를 펴는 형상인가.” 그런데
이 조선을 김교신만 보았던가. 다들 절망과 공포로 마음을 닫고서 역사에서 내뿜는 계시를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 9)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훼파되었습니다. 징벌을 당하여 그 형편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사야는 폐허가 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오히려 희망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소망의 이스라엘을 예언합니다.
그 소망은 바로 메시아의 오심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강림하셔서 다스리는 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낙망의 때에 위로를, 아픔의 때에
잔치를, 절망의 때에 소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메시아의 때는 희망의 때입니다.
백성들의 눈에 이스라엘은 수풀이 불에 타 재가 되어 버린 희망 없는 세계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사야의 눈은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아 새로운 살림의 풍성함이 오듯 이스라엘에 왕성한 메시아 왕국이 도래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통치 아래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과거의 야생적인 약육강식의 세계를 벗어나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입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메시아가 통치하는 세계에서는 죄가 사라입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온 과거에는 사자나 표범처럼 행동하고 살았지만, 주님의 통치하시는
시대가 도래하면 어린양같이 되어 온갖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성품들이 사라집니다. 이리와 곰같이 포악하고 잔인했던 자라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다스림을 받게 되면 온건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인간 사회에서는 모두 한 형제와 자매로 다져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어린아이에게 이끌립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합니다. 선한 목자가 다스리시는 세계는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으로 아름다운 평화의 세계입니다.
평화의 세계, 화해의 때, 소망의 나라를 건설할 하나님 나라의 건축자 된
여러분! 사회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를, 가정 공동체를 평화의 세계로 건설하는 주역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악한 우리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다스려 주셔서 무엇이든지 용납할 수 있는 심령 천국을 이루게
하옵소서. 아멘.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 11:10)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우리를 향해 소망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본문은 메시아의 재림으로, 흩어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한 곳으로 모여들 것을 선포한 종말론적 예언입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장대한 나무와 빽빽한 산림처럼 그 기세가 충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대제국의 위용을 떨치며 남유다까지 정복하려고 대군을
앞세우고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거니와 전쟁은 결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대하 20:15).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인 히스기야 왕에게 앗수르가 격파되었고 유다가 승리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앗수르가 멸망하면 뿔뿔이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고 이스라엘은 옛 영화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충성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고 우리의 완악한 성품을 온유하게 하사 우리의 마음을 천국 되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진실한 믿음과 인내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성품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재림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복음 전파의 기수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이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같은
믿음을 품고 메시아로 말미암아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소망을 하늘에 두는
사람, 그 하늘 소망을 가슴에 품는 사람이 됩시다. 온 세상에 흩어졌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한 곳에 모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화에 참예케 되는 그날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총 아래 새 하늘의 영화를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복음 증거의 기수로 살게
하옵소서. 아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 28:16)
본문에서 이사야는 타락하고 방종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재앙과 사망의 징계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을 향해, 심판이 유보될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때가 지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에게 구원이 약속되어 있음을 말하면서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영원하고
견고한 초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경고하실 때는
언제나, 사람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노아를 통해 세상을 향한 홍수 심판을 선포하셨을 때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기회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주어집니다. 지혜로운 자는 경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 견고한 초석이신 주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까? 아모스서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막힘 없이 흐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막아버린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리고 교회에서조차 지도자들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막혀 있으니 어느 곳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막힘 없이 흐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명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 있는 곳에
말씀이 흐르도록 하는 일입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했던 이사야처럼, 귀를 막은 이 시대를 향해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 앞에서 한 생명 한 생명이 ‘견고한 초석’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방주를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신뢰함으로 심판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사
29:16)
때가 되면 모든 것은 반드시 바깥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거짓과 위선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것은 진정성과 가식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차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성과 마찬가지로 영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의 사인을 받고도 잘 알지
못합니다.
영적 무지는 오늘날처럼 물질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의 수준이 지금보다 많이 낙후된 시대에도 영적
무지가 있었음은, 영적 긴장감을 해체하는 요소가 물질문명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남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영적 무지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며 그 파급력도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영적 무지는 먼저 하나님의 사인과 음성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거부하게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그들의 행동과
음성은 그래서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심으로 영적 무지를 가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한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쳤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나 결국 거짓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위선된
언행’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외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망의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내 영적 무지의 수준입니다. 안다고 했을 때 이미 그것은 교만의
늪으로 빠지는 것이 됩니다.
진정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실 그분이 이미 우리의 믿음 안에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기다리고 소망해야 할 것은 내가 영적으로 눈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뜸으로 이미 오신 그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임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영적 감수성을 무디게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들에 현혹되지 말게
하시고 영적 눈뜸을 위해 더욱 정진하게 하옵소서. 아멘.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사 31:5)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가에 의지합니다. 어떤 이는 명예를 의지하고, 어떤 이는
물질을 의지하며, 어떤 이는 사람과의 관계에 의지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며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을 생각하며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이사야서 30장 1-7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한다고 질책하시며 이것은 비신앙적 태도라고 규정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의지하는 이유는 애굽에 병거가 많고 마병이 심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한 것은 안타깝게도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죽고
썩어 없어질 육체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며 한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유한한 세상의
것에 집착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좌우됩니다. 크고 좋고 화려한 것에 정신을 빼앗깁니다. 죄의 유혹 앞에 무력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들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은혜를 잊었다는 것입니다. 체험을 하였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영원한 주권자이시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우리를 세상의 것에 눈멀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에 담대함을 가지게 합니다.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완전하게 이기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때 우리가 돌아볼 것은, ‘나는 누구를 믿고
의지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으로 만날 때 예수님은 나에게 오십니다.
저희가 세상을 의지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아멘.
로마서 9: 1∼9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 1∼3)
[묵상내용]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냅니다. 첫째, 바울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영혼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1∼3절).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의 형제들이 믿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한 큰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꼈으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신의 형제들이 구원받는 것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마음은 성령께서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없이 살던 자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시던 목자의 심정이었습니다(마 9: 36).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도 바울이 안타까워했던 이유는,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8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던 특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러나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대를 잇지 못하고, 오직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가 되어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믿음의 자녀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을 향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안타까운 마음을 따라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믿지 않는 이웃들을 향해서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여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