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07年 06月 ▶
|
| Sun |
Mon |
Tue |
Wed |
Thu |
Fri |
Sat |
| |
|
|
|
|
01 | 02 |
| 03 | 04 | 05 | 06 | 07 | 08 | 09 |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
| ㆍ제 목 : |
올링거 Franklin Ohlinger, 미북감리회 |
|
|
|
ㆍ날 짜 : 2008-02-24 Sun.
Prev Next |
ㆍ조회수 : 6,900
|
|
|
|
올링거 Franklin Ohlinger, 미북감리회
[묵상내용]
‘조선의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목사를 소개하려 합니다.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창식은 철들면서 농촌생활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여기고 열다섯 살 되던 해,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의 집 머슴살이나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 서울 장안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서양사람들이 조선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두어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더라.”
이 소문의 진상은 이랬으니, 1888년 여름, 3년 전 서울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데려다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할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흥분한 사람들이 소문의 진위도 확인하지 않은 채,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에 난입하여 집기들을 때려부쉈고, 그 바람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른바 ‘영아소동(baby riot)’입니다. 당시 결혼하여 남대문 안에 살던 김창식은 어느 선교사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를 ‘요리사’로 승진시켰고, 정중하고 예절 바르게 대해주었습니다. 나랏님(고종)과 자주 만난다는 높은 신분임에도, 하인에 불과한 그에게 보내는 선교사의 눈길과 손길은 따뜻하기만 했습니다. 하인을 인간취급도 하지 않은 조선 양반들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는 선교사에게 감동했으며, 그들의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김창식은 마침내 개종을 결심하였고 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목회자 수업을 받아, 결국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바로 김창식을 새 삶으로 인도했던 분이 올링거 선교사입니다. 올링거는 본래 1870년부터 중국선교사로서 상하이 감리교활판소에서 활동하며 문서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올링거 선교사를 불러들여 삼문출판사를 맡겼고, 결국 올링거는 내한하게 됩니다. 그는 배재학당에 서구식 인쇄기와 주조기를 설치하고 삼문출판사의 업무를 시작했고, 많은 기독교 단행본과 성서, 배재학당 교과서 등을 출판해내며, 한국 출판문화의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김창식의 일화를 통해 보았듯 진실하고 따뜻한 목회자였던 올링거는, 1888년 인천내리교회를 개척 설립하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는 정동교회를 담임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 |
|
|
|
|

※ 로그인한 사람에게만 덧글쓰기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로그인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