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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제 목 : |
캠벨 Josephine P. Cambell, 1852-1920, 미남감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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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날 짜 : 2008-04-06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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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수 : 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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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Josephine P. Cambell, 1852-1920, 미남감리회
[묵상내용]
조세핀 캠벨은 일찍이 목사였던 캠벨과 결혼했으나, 1880년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과의 사별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이어서 자신의 두 자녀까지 병으로 잃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녀에게 믿음으로 슬픔을 딛고 자신의 삶에 아름다운 승리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선교사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조세핀 캠벨은 시카고에서 간호학교와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선교사가 되었고, 상해에서 1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던 중 캠벨은 미남감리교회에서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그녀는 한국 땅을 주께서 지적하신 ‘땅끝’으로 믿게 됩니다. 한국 땅으로 눈을 돌리게 된 그녀는 결국 한국에 온 미국 남감리회 최초 여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1897년 자신과 중국에서 함께 있었던 중국인 양녀(Dora Yui)를 데리고 내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여성을 위한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녀들의 교육의 현장이 오늘의 배화여자고등학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배화학당의 창설은 그녀가 한국에 남긴 흔적의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캠벨은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의 여사감으로 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1918년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가 병을 얻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8월 재차 내한하였고, 결국 1920년 11월 12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한국의 여성교육과 교회설립에 혼신을 다했던 그녀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녀가 가족을 잃은 아픔을 딛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며 그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서 보여준 아름다운 삶은, 우리가 흠모하며 우리 삶에 간직해야 할 흔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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