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은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교회의 형태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와 이를 치죄한 정순왕후의 토사교문(討邪敎文)의 내용은 가톨릭교회와 조선 조정 사이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황사영은 정약종의 사위로, 청국인 주문모 신부를 남달리 섬기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던 열렬한 신도였다.
본래 경상남도 창원 태생인 그는 신유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에 있는 배론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친구 황심(黃沁)과 모의하여 조선 교회를 교난의
위기에서 구한다는 일대 계략을 꾸민다. 길이 62cm, 폭 38cm의 흰 비단에 무려 1만 3천여 자로 적은 그의 비밀서한(황사영 백서)은
청국의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에게 밀송하기 전 발각되어 형언하기 어려운 처절한 박해를 전국적으로 불러온다. 이때 순교의 피를 흘린 교인의 수는
3백을 넘었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천주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곧 천주를 대신해서 징계와 벌을 줄 것이오. 죽어도 다시
돌아서지 않겠노라”는 표현까지 불사한다. 그의 표현은 격렬하였다. 그것은 성교(聖敎)에 대한 그의 열정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망하여
없어져도 성교의 표는 남아있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의 신앙은 순수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조의 사회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반역의 요소로 비춰지고 있었다. 신유의 옥사를 치른 정순왕후는 다시는 사교의 비리가 없도록 경고하는 토사교문을 작성해서
국내에 두루 공포한다. 이 교문은 서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나라를 원망하며 뜻을 상실한 무리들로서 신앙을 이유로 한 반역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다. 그리고 종교는 종사의 안녕에 반(反)하지 않는 한에서 정론이라는 입장을 천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의
유교와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교회가 둘 다 정교일치의 구조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교일치의 사회에서 정통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황사영의 울트라몬태니즘(Ultramontanism, 교황권지상주의)과 정순왕후의 시저로페이피즘(Caesaropapism,
황제교황주의)이 병존하는 일은 그래서 구조적으로도 불가능하였다. 유교와 가톨리시즘 중에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신앙의 양상은 결국 조선조의 박해와
가톨릭교도의 순교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