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자의 찬송
[본문말씀]
시편 22: 22∼31
[묵상내용]
시편 22편 후반부는 전반부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라지고 맑게 개인 하늘에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날과 같습니다. 긴 어둠의 시간이 지난 후 수난자가 처음으로 서있는 곳은 예배가 있는 회중 가운데였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합니다(22절). 그리고 함께한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경외할 것을 촉구합니다(23절). 그분은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24절). 수난자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통해 큰 회중 앞에서 찬송할 수 있고, 그들 앞에서 자신이 서원한 것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25절).
그러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수난자는 확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 즉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자는 먹고 배부르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26절). 이런 사람들의 마음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운이 언제나 가득하게 됩니다.
이제 수난자의 시선은 개인이나 언약의 백성에만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의 시야는 온 우주와 역사 전체로 확대됩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통치자임을 깨닫고 그분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27∼28절).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던 세상의 풍성한 자들도 하나님을 찾게 되며, 심지어 진토에 내려가는 자, 즉 죽게 되어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하나님께 경배할 것입니다(29절). 이뿐 아니라 후손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장차 올 세대들도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30∼31절).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언약의 백성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을 포괄하고 모든 세대에 미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난자는 어떻게 이런 고백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가 당한 고통이 큰 만큼 하나님의 구원이 크고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깊고 깊은 암흑을 뚫고 나온 그의 찬송소리는 모든 장벽을 뚫고 온 누리 모든 세대에 울려퍼지게 됩니다. 이러한 수난자의 고난과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사람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빌 2: 8∼10).
[오늘의기도]
기도
[본문말씀]
누가복음 22: 39∼53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 22: 46)
[묵상내용]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누는 대화입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주님을 향해 마음이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향해 열린 나의 마음은 고요하고 조용한 곳을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과 만나는 홀로 있음의 시간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지금까지 나에게 익숙했던 것과 거리를 두지 않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현대를 사는 우리가 그렇게 조용한 곳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위해 떠날 준비를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겸손한 무릎으로 내딛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밤에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이 모두 다 잠든 그 시간에, 홀로 있음의 자리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침묵 중에 고요함 중에 기도하셨습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시작한 주님의 기도는 자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남기지 않으시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를 향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부어주시는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시험을 이기고 주님을 따르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배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41절).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알고 순복해야 합니다(42절). 성령께서 도우시는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43절). 그리고 힘을 다해 더욱 더 간절히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44절)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버지와 대화하셨는지 배우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일어납시다. 우리에게 있는 슬픔과 절망 혹은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장애를 뒤로 하고 일어나, 신실하신 아버지 앞에 겸손히 나아갑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길을 따라가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의기도]
예수님을 따라 일어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겸손과 순종, 돕는 은혜와 넘치는 사랑이 우리 안에 채워지게 하셔서 능히 세상의 시험을 이기며 승리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의 불꽃이 되어
[본문말씀]
요한복음 3: 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 16)
[묵상내용]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을 때, 사랑이 한 사람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사랑이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바꾸는 힘입니다. 또한 사랑은 절망을 이겨내게 하는 경이로움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 이렇다고 한다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도, 쉽게 형언할 수도 없는 신비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는 이들이 사랑에 휘감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찾아오신 그의 아들마저도 외면해버린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뜨겁게 불태우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지금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신비로운 사랑은 지금도 우리를 휘감아서 우리를 또 다른 사랑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중 하나가 아닙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요,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에게서 주어진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우리 각자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고 표현하듯,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들에게 사랑의 불꽃으로 세상에 나가 어둠에 속해있는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만드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갑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고, 또 나를 통하여 세상에 전해지는 통로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살 뿐만 아니라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고 용서될 그 사랑의 빛으로 오기를 거절합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가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담대한 믿음으로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ㆍ요한복음 5: 30∼47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 41)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인정을 받고 그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시간이 가고 지위가 달라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추종과 찬양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삶으로부터 주어지는 영광은 늘 한 곳,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얻은 인기와 영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바로 이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자신이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서 주어지는 달콤한 인기와 영광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광을 탐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주어지는 영광은 오래 유지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한 분의 영광을 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영광을 얻기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혹 사람들이 던져주는 몇 마디 칭찬에 목말라하지는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기로 결정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정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세상이 주는 선물꾸러미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마시면 더 큰 갈증이 생기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닌,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참제자의 길을 걸어갑시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ㆍ누가복음 1: 5∼25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 13)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먼저 다가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필요가 다 채워진다면 이 세상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질지도 모릅니다.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에, 신의 업무를 일주일 동안 대행하는 브루스가 모든 사람의 소원을 다 들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권을 산 모든 사람들이 1등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그 소원이 다 이루어집니다. 결국 복권 값만큼의 당첨금이 나오자 모두들 분개합니다. 이렇듯 자신을 위한 욕심은 설령 뜻이 이루어진다 하여도 그 결과는 좋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도를 통한 결과는 늘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도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6절). 흠이 없이 주의 말씀을 지킨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제사장이었던 사가랴가 분향하는 그 순간에 주의 사자가 그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결혼한 지 오래되었고 늙었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자식을 갖는 것이 그들의 오랜 기도제목이었을 것입니다.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신다며,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않고 침묵하며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되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 17)”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시고 적절한 때에 이루어주실 줄 믿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20절)”고 천사는 말합니다. 기다림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 시간 동안 조마조마하면서 마음을 애태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태어나 주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부모의 오랜 기도가 이루어진 결과로 그들은 아들은 얻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합니다. 또한 복음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질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간구함을 들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우리의 고백이 주님의 뜻을 위한 믿음의 간구와 소망이 되게 하소서. 아멘.
ㆍ누가복음 1: 26∼38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 37∼38)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말씀하시면’이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네비게이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영적인 네비게이션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습니다. 말씀 없는 순종은 대개 자신이 만든 신앙의 틀이기 쉽습니다. 진정한 순종과 진정한 믿음의 확신은 말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본문은, 생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말씀대로 믿은 한 여자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했다거나, 은혜를 입었다거나, 온유한 사람이었다거나 혹은 의인이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했더니 은혜를 입어서, 그 견디기 힘든 시간들을 믿음으로 이겨낸 후 결국 한 나라의 총리가 됩니다. 모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도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정을 받으면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패배자를 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늘 훈련받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입은 여자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겪어보지 못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하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가기 싫어도 나아가겠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주님이 멈춰 서라면 내가 가야 할 것 같아도 멈춰 서겠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고 아픔입니다. 나를 위함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오니 주님, 말씀하여주소서. 아멘.
시편 23편은 아마도 일반인들에게까지도 가장 잘 알려진 시편일 것입니다. 표현은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깊고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의 주제는 도입부에 명시되어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이 구절을 독일의 구약학자 쾰러(L. K쉎ler)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한, 나는 어떤 궁핍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둔 사람은 부족함 없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2∼5절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풍성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둔 사람은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를 경험하게 됩니다(2절). 목자의 돌보심 속에서 우리는 영혼의 소생함을 입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3절).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어둠의 시간에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함께하셔서 두려움 없이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4절). 대적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시고,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잔이 넘치게 하시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게 하십니다(5절).
여기에서 잠시 시편 23편의 서술방식을 살펴보면, 1∼3절에서는 하나님을 ‘그분’으로, 4∼5절에서는 하나님을 ‘당신’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객관적인 서술에서 직접적인 언급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객관적인 지식의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로 연결되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은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성숙하고 발전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시인은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계속될 것이며, 자신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6절). 여기에서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성전에 거주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을 확신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자는 평생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신 인도와 보호를 받고 부족함 없이 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본문말씀]
시편 23: 1∼6
[묵상내용]
시편 23편은 아마도 일반인들에게까지도 가장 잘 알려진 시편일 것입니다. 표현은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깊고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의 주제는 도입부에 명시되어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이 구절을 독일의 구약학자 쾰러(L. K쉎ler)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한, 나는 어떤 궁핍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둔 사람은 부족함 없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2∼5절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풍성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둔 사람은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를 경험하게 됩니다(2절). 목자의 돌보심 속에서 우리는 영혼의 소생함을 입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3절).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어둠의 시간에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함께하셔서 두려움 없이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4절). 대적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시고,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잔이 넘치게 하시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게 하십니다(5절).
여기에서 잠시 시편 23편의 서술방식을 살펴보면, 1∼3절에서는 하나님을 ‘그분’으로, 4∼5절에서는 하나님을 ‘당신’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객관적인 서술에서 직접적인 언급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객관적인 지식의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로 연결되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은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성숙하고 발전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시인은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계속될 것이며, 자신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6절). 여기에서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성전에 거주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을 확신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자는 평생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신 인도와 보호를 받고 부족함 없이 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성탄의 자리
[본문말씀]
누가복음 1: 67∼80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 78∼79)
[묵상내용]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전 우리나라에는 야간통행금지 시간이 있었습니다. 분단된 나라의 고통이 야간통행의 자유를 유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성탄절 전날과 신년 연휴에는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습니다. 모처럼 자정을 넘어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해방감에, 성탄절 전날에는 밤새도록 거리마다 사람의 물결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날 청년들과 청소년들은 온 밤을 새우며 놀이를 하다가, 기다리던 선물교환의 시간을 갖고, 성탄절 새벽에 교인들 집을 가가호호 다니며 새벽송을 돌았습니다. 성탄절 예배를 드리며 성가대에 앉은 청년들은 하나같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였지만, 어른들은 은은한 미소로 이를 용납해주시던 낭만적인 성탄절의 풍경이 있었습니다. 새벽송을 돌며 받았던 선물은 고아원 등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곳을 찾아 나누어 성탄의 기쁨을 나누려 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습니다. 야간통행금지도 해제되고, 세상과 교회의 성탄맞이도 변했습니다. 세속화 물결이 성탄을 상업주의로 포장하였습니다. 거리마다 성탄을 축하한다는 불빛으로 휘황찬란합니다. 상점은 성탄 선물을 가득 채우고 손님을 기다립니다. 성탄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요, 기회로 전락했습니다. 교인들도 성탄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기보다 성탄 연휴를 어떻게 지낼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이런 세류 속에서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은 과거와 다르게 더 깊은 아픔을 가슴에 담게 됩니다.
성탄절 전날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어디로 오실까요? 주님이 오실 그곳에 우리가 있어야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의 자리가 상업주의로 채색된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가 아님은 누가복음의 사가랴의 예언에서 알 수 있습니다(67∼79절). 사가랴는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76절)”할 세례 요한의 출생을 기뻐하면서, 태어나실 메시야께서 하실 구원의 사역을 고백합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79절).” 성탄의 장소가 어둠과 그늘에 앉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성탄 맞음이 어디로 향하여야 할지를 지시합니다. 성탄 축하의 찬란한 불빛이 만드는 그림자 안을 사랑으로 찾아가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기도]
세상의 참빛으로 오시는 주님, 우리로 성탄을 기다리면서 주님 오실 그곳을 앞서 찾아가게 하소서. 사랑과 위로의 빛을 기다리는 이들의 가슴에 소망을 담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의 가슴앓이
[본문말씀]
요한일서 4: 7∼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 10))
[묵상내용]
같은 사건이나 사물을 보아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병에 남은 음료수를 보면서, “누가 반을 마셨구나”하거나 “아직도 반이 남았구나”하면서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우산을 파는 아들과 얼음을 파는 아들 둘을 둔 어머니가, 날이 개이면 우산 파는 아들 걱정으로, 비가 오면 얼음 파는 아들 걱정으로 매일 울기보다는, 날이 개이면 얼음 파는 아들로 비가 오면 우산 파는 아들로 매일 웃게 된다는 이야기도, 관점에 따라 같은 사건의 해석이 달라짐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온 세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합니다. 성탄은 죄인 된 우리의 자리에서는 복음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의 사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살 길을 여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사건인 성탄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탄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탄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사건이 성탄입니다. 그것도 나중에 십자가에서 희생의 번제물로 드려지는 것으로 정해진 탄생입니다. 이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람을 사랑하셔서,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아들을 세상의 구원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를 헤아려볼 때, 성탄을 마냥 즐거워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가슴앓이입니다. 이 가슴앓이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앓으시는 사랑병의 열매입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은 성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의 자리로 옮겨 이해하게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절).” 우리를 살리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가슴앓이는, 우리로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길임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같이 앓는 것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20절)”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성탄절 축하일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앓이에 감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성탄절의 뒷자리를 살핌
[본문말씀]
사도행전 6: 1∼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 7)
[묵상내용]
큰 행사가 끝나고 나면, 늘 뒤처리 문제가 대두됩니다. 시청 광장의 수만 명의 촛불 시위나, 운동 경기장에서 관람객이 떠난 후에 남겨진 쓰레기 청소 문제가 간단치가 않습니다. 휴가를 다니며 생긴 쓰레기를 잘 정리하셨나요? 어떤 일을 계획하여 실행하면서 마무리가 잘 안되어 곤란을 겪은 경험은 없습니까? 바둑에서 끝내기는 승패에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아무리 포석을 잘 하고 중반전에서 우세하게 판을 이끌다가도, 끝내기에서 정밀하지 못하면 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지낸 후의 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 나눔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이 사랑 나눔을 받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이들과 오붓하게 성탄의 연휴를 즐기는 것을 나무랄 수야 없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를 비우시고 낮은 자리에 오신(빌 2: 5∼11) 뜻을 새겨볼 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탄절을 지키며 우리는 이웃사랑을 말합니다. 이 던진 말의 마무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어떻게 자라고 복음이 확산되었는지 알려줍니다. 교회는 일곱 집사를 뽑았습니다. 이들이 맡은 역할은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교회의 궂은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4절).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몸으로 증거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능력이 있게 됩니다. 말로는 이웃사랑이 주님의 복음이라고 하고 뒷받침하는 실천이 없다면, 그 말은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는 사도들이 말씀을 선포하는 동안, 그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며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왕성하고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질 수 있었습니다(7절). 그렇게 율법적으로 철저한 유대교 제사장까지도 예수님의 복음에 이끌리게 된 일은 그냥 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삶도 말씀과 행위가 따로 되어서는 성숙한 믿음을 이룰 수 없습니다. 복음 전파의 열매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말만 많고, 말뿐인 사람으로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성탄절의 큰 절기를 지내고 난 후의 자리를 봅니다. 혹시 우리의 성탄절이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와 같이 말만 앞세운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면서, 부족한 것이었다면 채우는 하루를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우리의 말과 행함이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함께할 줄 아는 사람
[본문말씀]
요한복음 13: 31∼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 34∼35)
[묵상내용]
신앙인의 삶은 기준이 있는 삶입니다. 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행복을 주는 삶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 기준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먼저, 신앙인의 삶은 사명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31절). 예수님의 삶은 사명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십자가입니다. 이제 곧 그 사명이 완수될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요 예수님께도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잘 이루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와 성격, 기질과 스타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제대로 깨닫게 될 때 감추어져 있던 잠재력과 강점이 비로소 발휘됩니다. 삶이 사명을 따라 이루어질 때,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리는 여유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의 주변에는 회복의 싹이 돋아나게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행복해하실 것이며, 나 때문에 내 가족이 행복해질 것이며, 나 때문에 이웃과 교회가 행복해질 것입니다. 천국백성은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신앙인의 삶은 ‘함께하는’ 삶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4∼35절).”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한 마디로 ‘함께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항상 함께 일하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가룟 유다는, 홀로 생각하고 홀로 행동하다가 실패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친구’를 ‘함께 슬픔을 지고 가는 사람’이라 합니다.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숨겨진 능력도 발휘하게 됩니다. 함께 일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능력도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서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기쁨도 고난과 환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그것이 능력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호언장담하고, 칼을 들고 설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실수만 저지르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열매로 가득찬 삶으로 변모합니다. ‘위하여’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입니다. 천국백성은 ‘함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하시고, 주님이 몸소 실천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인정해주고 동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소서. 아멘.
격이 있는 사람
[본문말씀]
마태복음 18: 1∼1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 4)
[묵상내용]
제자들이 주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물었습니다. 사심이 묻어난 그 질문을 들으신 후 대답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천국시민의 미덕’을 나눠보겠습니다.
천국시민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4절). 우리는 대개 작은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건물붕괴 사고가 잦은 한국, 철도 사고가 잦은 일본…. 대체로 아주 작은 것 하나를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작은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대하게 사용하신 것은, 그가 지극히 작은 것에 성실한 모습, 양 한 마리에게도 최선의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을 통해, 왕의 자질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천국이 겨자씨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시민은 말과 생각과 행동에 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손과 발, 눈과 마음에 짓는 죄를 경고하셨습니다(5∼9절).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타인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천국시민이 아닙니다. 세계는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합니다. 영국인들은 신사라는 이름에 자존심을 겁니다. 세계는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라고 합니다. 프랑스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예술적으로 하려 애를 씁니다. 천국시민은 천국의 고유한 격과 매력이 담긴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천국시민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작은 사람도 소중히 여길 것을 부탁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다 잘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14절). 미술가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꼭 어린아이의 장난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최고의 예술가 피카소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피카소보다 훨씬 위대한 예술가인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사람의 차별이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두가 최고의 걸작품들입니다.
내 남편의 사회적인 지위가 좀 낮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아내가 좀 부족해 보여도 그는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자녀가 좀 소란스럽더라도 하나님의 걸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천국시민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 생각과 말과 행동에 격이 있는 사람, 최고를 최고로 볼 줄 알고, 최고를 최고로 대접해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우리로 천국시민의 미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소서.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생각과 행동과 말에 격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든 사람들의 진정한 가치를 보게 하소서. 아멘.
거부할 수 없는 말씀
[본문말씀]
요한복음 7: 37∼52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요 7: 46)
[묵상내용]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직접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아주 맛있는 음식이라고 추천했더라도, 자신이 실제로 먹어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맛이 없을 수도 있고 더 맛있을 수도 있기에, 자신의 입을 직접 거치기 전에는 그 맛을 확신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가가 자신에게도 그대로 맞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졸린 영화가 다른 사람에게는 눈물나는 영화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음식과 영화에 대한 맛과 느낌이 주관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일단 자신이 체험한 것에 대해 가지는 확신의 정도에 있어서는 대부분 비슷합니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 모두가 그 말씀에 순종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일반적인 가르침들과는 다른, 새롭고 놀라운 내용이라는 점은,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윤리적인 교훈이나, 성공을 위한 처세술, 율법의 전수가 아니라, 사람들의 속마음을 다루고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 영혼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귀가 열릴수록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주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무리 중에서 쟁론할 때,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감히 그분에게 손을 대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직접 그 말씀을 듣고 나서는 도저히 잡을 수 없어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44∼46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꾸중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두둔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진리의 체험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날마다 직접 맛보며, 더 이상 부인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목마른 저희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본문말씀]
시편 24: 1∼10
[묵상내용]
시편 24편은 내용과 성격이 매우 다르게 보이는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1∼2절)에서,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주인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창조사건에서부터 드러납니다.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건설하셨다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서술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와 강을 정복하시고 질서의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강조합니다(참조, 창1: 2). 이 땅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부정할 수 없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두 번째 단락(3∼6절)에서, 시인은 성전입장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왕권에 적합한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은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서있는 그곳은 창조를 통해서 확립된 하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오를 자와 설 자를 묻는 것은 하나님의 왕권에 어울리는 삶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허망한 데에 마음을 두지 않고,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여호와를 찾는 자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찾는지가 삶의 도덕적 윤리적 수준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찾을수록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에 관심을 갖게 되며, 순결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단락(7∼10절)은 성전에 들어가시는 영광의 왕이 누구이신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법궤의 성전입장 의식을 통해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가 어떤 분인지를 강조하고 밝히는 것이, 이 단락의 서술 목적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강하고 능력이 많으시며 전쟁에 능한 용사이시며,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도 승리하시어 영광의 왕이 되셨음을 선포합니다.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어 온 우주의 주인이 되셨고, 깨끗하고 신실한 자에게 복과 구원을 베푸심으로 왕의 권위를 나타내셨으며, 전쟁에 능하신 분으로서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ㆍ요한복음 8: 12∼19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요 8: 18)
최근 적지 않은 교회들이 소그룹모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그룹에서는 친밀하고 깊은 관계 형성이 가능하기에, 건강한 공동체성을 갖추어야 하는 교회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과제라 하겠습니다. 사실 소그룹의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와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해오는 것으로,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오늘날, 참된 공동체 정신을 지닌 소그룹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돌봐주며 격려합니다. 소그룹은 마치 또 하나의 가족처럼, 사람들이 힘들 때 그리고 기쁠 때에 함께합니다. 성도들은 소그룹 안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며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소그룹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근본적으로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요 8: 29)”을 행한다며,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요 17: 21)”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으로 보내셨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과 말씀이 옳음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 17, 17: 5, 막 9: 7)”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예수님과 함께하시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증명해보이셨습니다. 이렇듯 하나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증명해주는 일치와 조화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한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계속해서 요구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상적인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초청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 21).” 우리는 그 공동체의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하며, 주님과는 물론, 그 안에 속한 모든 이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시어,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맺으신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인정을 받고 그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시간이 가고 지위가 달라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추종과 찬양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삶으로부터 주어지는 영광은 늘 한 곳,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얻은 인기와 영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바로 이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자신이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서 주어지는 달콤한 인기와 영광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광을 탐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주어지는 영광은 오래 유지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한 분의 영광을 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영광을 얻기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혹 사람들이 던져주는 몇 마디 칭찬에 목말라하지는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기로 결정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정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세상이 주는 선물꾸러미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마시면 더 큰 갈증이 생기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닌,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참제자의 길을 걸어갑시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