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골로새서 2: 6∼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묵상내용]
새해 아침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시고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 맞이한 이 한 해, 우리의 마음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에 굳게 뿌리내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6∼7절).”
“(그 안에) 뿌리를 박아라, (그 뿌리 위에 네 모든 삶을) 세워라, 그리고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왜 이런 권고가 따르겠습니까? 세상살이에 풍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수시로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착각과 회피, 자기합리화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8절).” 갖가지 고상한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말(언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 믿음을 혼잡하게 하는 유혹은 말에만 있지 않습니다. 화려하게 포장된 이미지와 풍조들 역시 우상이 되어 믿음을 혼잡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어지럽히는 유혹은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내 안의 우상이 더 위험합니다. 우리는 자기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은 예수를 삶의 중심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예수 한 분으로 내 마음이 가득 차면 그 외의 세상 것들은 부족함 없다고 여기는 것이 믿음의 정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 1).” 세상에서 이보다 더 부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호기심과 두려움과 안전의 욕구가 있습니다. 보다 더 잘 살고자 하는 상승의 욕구가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본능이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현실에서 타자를 향한 공격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은 이러한 욕구와 본능들을 순화시키고 성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이 한 해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뿌리내리게 하소서.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늘부터 시작되는 믿음의 여정이 감사의 열매로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히브리서 11: 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 1∼2)
[묵상내용]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습니다. 성서에 전개되는 수많은 사건과 신앙인들의 이야기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서 일어난 긴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다급한 나머지 하나님의 뜻을 잘못 받아들인 경우도 있고, 낙심하여 믿음으로부터 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사탄의 유혹에 종사한 경우도 있습니다. 벗어나고 싶은 역경을 지나고 보니, 그 역경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었음을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수많은 인간사가 채워져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굳이 비틀어서라도 성취하려는 욕심으로 인해, 우리는 항상 시험에 들고 공동체를 어지럽힙니다.
우리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을 지닌 사람의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합니다. 큰 믿음을 자랑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데서 나아가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편에서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끊임없이 변덕을 부립니다. 참지 못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비틀기를 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인간의 고통은, 악의 준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임의로 해석하는 인간의 과욕에 연유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있으라(눅 12: 35)”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적 긴장을 늦추는 순간 사탄은 믿음의 밭에 의심의 씨를 뿌립니다. 내 힘으로 하나님나라를 앞당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12절)”처럼 참고 기다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빛나게 합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인내로써 가꾸는 믿음을 지니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시고 선하심을 믿는 믿음이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히브리서 11: 13∼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 16)
[묵상내용]
영국의 대문호 C. S. 루이스에게는, 자기의 살이라도 베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친구 찰스 윌리엄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찰스가 갑자기 먼저 죽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친구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조사(弔詞, 남의 상사에 조의를 나타내는 글이나 말)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루이스는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이 내게는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멀리 생각했던 천국인데 그곳에 내 친구 찰스가 가있으니, 이제 천국은 아주 가까운 내 이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일 년이 못 되어서 루이스의 아내 조이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루이스 부부는 금슬(琴瑟)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또 아내마저 잃어버리게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은 내 집처럼 되었습니다. 아내 조이가 거기서 살고 있고 친구 찰스가 거기에 있으니, 나도 얼른 가서 그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유명절인 설날과 추석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향해 귀성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도 우리들의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에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있을까요?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6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할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올 때도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의 눈을 열어주셔서 세상의 유혹과 시련들을 담대히 이기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히브리서 11: 23∼31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 26)
[묵상내용]
어느 목사님이 가족들과 함께 미국유학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두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모두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절대 아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의료보험이 너무 비싸서 보험에 가입할 형편이 안 되기에, 누구라도 아프면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해 겨울 신학교 교정에 눈이 내린 어느 날 아들이 눈썰매를 탔는데, 앞에 있는 아이를 피하려다 나무에 부딪히는 사고가 났습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가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빠에게 묻더랍니다. “아빠, 미안해. 이제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몸이 다쳐도 돈 걱정만 하는 아들이 불쌍하고, 자기가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아들을 끌어안고 울었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돈을 사람보다 혹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지는 않습니까?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동족을 위하여 모든 좋은 것, 왕자로서의 신분과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그 많은 것을 버렸어도 모세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곧장 쓰지 않으시고 40년 동안 광야(양치는 자)의 생활을 통해 그를 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세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것같이 교통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 1∼2).”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만약 광야가 없었다면, 모세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 화가 나면 사람을 죽이는 혈기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은 후 그는, 마귀가 충동질해도 혈기로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예수를 바라보자
[본문말씀]
11: 32∼1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 2)
[묵상내용]
저는 예수전도단 사역자들이 통장 하나 가지고 매일매일의 생활비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사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전도단 사역자들이 전 세계로 급속히 나아갈 수 있었던 비결임을 알았습니다.
예수전도단 창시자인 로렌 커닝헴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일하게 하시는가? 그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께서 실재하심을 매순간 확신케 하시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전도단 사역자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부딪히기도 하고, 유럽에서 공부벌레인 지성인들의 무관심에 부딪히기도 하는 등, 악조건 속에서 사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그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것(신 8: 2∼3)을 체험하였고, 하나님께서 전심으로 당신을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심(대하 16: 9)을 체험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엄청난 기록이 나옵니다. 바로 믿음으로 의를 행하고 부활을 구하며, 옥에 갇히고 채찍과 조롱을 받은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정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 38)”고 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언제나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은 일평생 5만 번 기도해서 모두 응답받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그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염려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가 감사하고 찬송을 하게 됩니까? 기도응답을 통하여 예수님이 항상 함께하시는 것을 체험한 성도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믿음의 조상들과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좋으신 하나님, 새해에는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아멘.
[묵상내용]
‘아리랑’은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서도 가장 상징적인 노래입니다. 그런데 구전으로 전해오던 아리랑이 가사와 함께 악보에 실리게 된 것은 푸른 눈의 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를 통해서였습니다. 헐버트는 참으로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자 했던 서양선교사였습니다. 한국민족의 기원, 언어, 풍습, 기질, 역사 등을 연구한 그의 많은 논문들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료인 동시에, 한국을 사랑했던 그의 마음이 배어있는 글들입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에 있는 그의 묘 앞에 서서 비문을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합니다. “비전의 사람, 한국의 친구(A Man of Vision and Friend of Korea).”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o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 주 회중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 인도선교사였던 외할아버지를 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자연스레 1884년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하였을 무렵, 한국정부는 국립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그 교사를 미국국무성에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을까요? 당시 헐버트의 부친과 동창이었던 국무성장관의 요청에, 형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헐버트가 교사로 선발되어 1886년 7월 4일 내한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던 중, 1891년 육영공원 축소의 문제로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1893년 목사안수를 받고 미감리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돌아와, 〈삼문출판사〉 운영의 책임을 지고 문서선교를 주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결코 문필활동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용기있는 행동으로 옮겼던 진정한 ‘한국인의 친구’였습니다.
우리나라 〈YMCA〉의 초대 회장으로서 한국의 청년들을 위해 헌신하였고,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자, 「The Korea Review」를 통해 일본의 야만적 탄압행위를 폭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고종에게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면서, 「회의시보(Courier de la Confere´nce)」에 한국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하였습니다. 결국 밀사사건으로 한국에서 추방을 당해 유럽 각지를 방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그 지극한 사랑은 오늘 우리의 마음을 더욱 울립니다. 비전의 사람, 한국의 친구 헐버트! 그는 58년 전 자신의 유언대로 그의 사랑,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내가 여기 있느니라
[본문말씀]
이사야 52: 3∼6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 5)
[묵상내용]
예루살렘에 가면 성 밖의 기혼 샘물에서부터 성 안의 실로암까지 단단한 바위를 뚫어 만든 450미터의 지하수로가 있습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정교한 기술에 놀라게도 하지만, 그보다도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그와 같은 공사를 할 수 있었는지 경악하게 됩니다. 동굴을 통과하노라면 공사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고통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립시킨 ‘전쟁의 공포’가 새삼스럽습니다.
그 지하수로는 유다의 14대 왕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산헤립은 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정복의 역사적 모델이 된 왕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정복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단 한 번 정복에 실패한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앗수르의 북쪽과 동쪽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남쪽으로 아람, 북이스라엘을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면서 유다의 온 성들도 다 정복한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높은 산 위에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위가 골짜기로 둘러싸여있어서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산헤립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예루살렘을 새처럼 가두고 성문을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운명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흔치 않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대군 18만5천 명이 전멸해버렸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역사가들이 의아해하면서 여러 가지 추정을 하는데, 열왕기서는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군이 멸절되고 유다가 구원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긴 세월이 지나 결국 완전하게 실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이 없습니다. 굳게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가 그 약속 위에 있으므로 어김없이 지켜질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고 우리의 고난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가장 믿음이 필요한 때인 줄 믿습니다. 약속의 성취가 더디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구원하시는 중보자
[본문말씀]
이사야 59: 15∼2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 20)
[묵상내용]
골로새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니어서, 바울이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혀있는 동안 이 교회에 스스로 ‘철학자들(the philosophers)’이라고 자칭하는 무리들이 들이닥쳤습니다(골 2: 8).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높은 신앙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교회들을 유린하고 혼란스럽게 하여 교회를 무너뜨리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교한 거짓 교훈을 물리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교회는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사도 바울이 가르친 복음이 곧 진리이며 정확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들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옥에 갇혀있던 사도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자신이 세우지도 않은 골로새교회가 자신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가르친 말씀을 진리로 믿으며 견고히 서서 복음을 수호한 이야기는, 옥중의 사도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 ‘철학자들’의 무리가 가르친 거짓된 교훈은 중보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고 참 하나님은 한 분뿐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된 존재이므로 중보자는 될지언정 하나님과 같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중보자의 직책도 유일한 것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다른 영적 존재들도 그러한 중보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중보자,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격하이며 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나시기 700년 전에 이미 예언되신 단 한 분 중보자(16절)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20절). 그분은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고 구원을 투구로 삼으시며, 죄를 물리치고 척결하는 데 열심이신 분이십니다(15∼17절). 하나님은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골로새교회처럼,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에 거하고 그 믿음의 터 위에 흔들리지 맙시다. 소망과 믿음을 가지십시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죄에 빠진 우리를 위해 중보자 예수님을 보내주심에 감사합니다. 다른 것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고 구원자이신 주님을 꼭 붙들게 도우소서. 아멘.
붉은 옷을 입고 오시는 주님
[본문말씀]
이사야 63: 1∼5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 63: 1)
[묵상내용]
‘붉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에돔’이 불신앙과 죄를 상징하는 에돔 족속에 적용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에돔 족속들의 조상인 에서의 피부가 붉은 색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가 동생 야곱에게 붉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셋째, 에돔 족속이 하나님의 장막을 떠나 정착한 요단강 너머의 땅 색깔이 붉은 색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붉은 색은 육신의 건강과 힘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그릇의 붉은 팥죽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소홀히 멸시함입니다. 붉은 색의 땅은 그들이 거하는 환경인 사회와 문화가 온통 죄로 뒤덮여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에돔으로부터 오십니다(1절). 그분은 붉은 옷을 입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붉은 색은 세상의 붉은 색과 의미와 격이 다릅니다. 보세요! 주님의 붉은 옷은 불신앙과 저주의 붉은 색이 아닙니다. 그분은 에돔의 세 가지 죄, 즉 육신을 의지함, 불신앙, 만연한 죄를 척결하시기 위해 붉은 옷을 입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포도를 밟듯이 적들을 발로 짓밟으심으로 구원의 해를 가져다주신 분이십니다(2∼3절).
주님께서는 홀로 그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는 데에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대적 아말렉을 두고 기도할 때는, 아론과 훌이 그 팔을 붙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아무도 그 십자가를 붙들어주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너무나 외로워 “나의 하나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하고 외치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을 오직 그분 혼자의 힘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 있는 에돔의 붉은 죄를 이길 힘은,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깊은 죄의 문제를 고민합시다. 세상과 더불어 많은 죄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십시다. 홀로 우리의 죄를 사하실 능력을 가지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피와 같이 붉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 육신의 자랑과 안목,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힘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으신 줄 믿습니다. 약한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ㆍ이사야 65: 1∼9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에 살 것이라(사 65: 9)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넓으신 마음과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는 사람의 간구도 들어주시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에게도 찾아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배신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두 팔을 벌려 환영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배반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사람들의 배반과 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진노하시지 않고 잠잠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인간이 여전히 죄악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금년 한 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을 생각해봅니다.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 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를, 싱싱한 포도즙이 가득 차 있는 포도송이이자(8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9절).
포도즙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한 삶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 차 있는 삶이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면 우리의 영은 더욱 기뻐할 것이고 세상을 이길 힘이 솟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라는 ‘자의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특별대우나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사람이고 사랑받은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한 포도송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존귀하게 사랑받고 살아가는 선택받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이 부르시는 내 이름
[본문말씀]
이사야 65: 13∼16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사 65: 16)
[묵상내용]
인자하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나 손녀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목소리에는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사이가 좋은 친구가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목소리에는 우정이 담겨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를 부를 때나 어린아이가 엄마 아빠를 부를 때, 그 목소리에는 깊은 신뢰와 존경이 담겨있습니다.
누군가 내 좋은 점, 잘한 일을 기억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누군가가 다정스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줄 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내가 잘한 일, 좋은 점은 기억하지 못하고 실수와 허물만을 기억한다면, 그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울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를 때, 좋지 않은 감정이 섞여있다면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가장 행복했고 좋았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가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어떤 마음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습니까? 그동안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을 텐데, 내가 사랑 품은 목소리로 불러주었기에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내 이름을 기억하기조차 하기 싫은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는 종들은 먹고 마시고 기뻐하고 즐거워 노래하겠지만, 말씀을 거역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굶주리고 목이 타며 창피를 당하고 심령이 상하여 통곡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을 새 이름으로 부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장차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 예수’라 지으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 17)”라는 하늘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셨습니다. 금년 한 해, 우리가 선한 믿음의 길을 달려간 후 하나님께서 불러주실 새 이름을 기대합니다. 매일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찾아오실 그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과 딸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새 하늘과 새 땅
[본문말씀]
이사야 66: 1∼2, 22∼23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사 66: 22)
[묵상내용]
오늘 말씀은, 포로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유대 땅으로 귀환한 직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메시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지도자들의 무능과 정치기강의 문란, 오랜 이방나라의 통치와 이방문화의 교류로 인한 종교의 혼합화 등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위협받던 시기였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고 성전재건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는 등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는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든 것을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마음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성전재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책하십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2절).”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했듯,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사람의 손으로 지어 봉헌한 예루살렘 성전을 뛰어넘어 이 세상 어디에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이사야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지어 봉헌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잘 가꾸고 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도 귀한 일이지만, 더 귀한 것은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도 중요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거룩한 주님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귀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크고 화려한 대형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크고 화려한 교회건축 그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금년 한 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가 살아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가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가 살아있는 새 하늘, 새 땅을 경험하며 또 만들어가도록 힘 주소서. 아멘.
벙커 D. A. Bunker, 미북감리회
[본문말씀]
[묵상내용]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된 후, 한국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면서, 미국 측에 교사를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미국공사 푸드는 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신학교에서 벙커, 길모어(Gilmore), 헐버트(Hulbert) 3인을 선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벙커는 육영공원이 폐쇄될 때(1894)까지 8년 동안 교사로 봉직하다가, 그 후에는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국감리회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1902) 후 배재학당의 학당장이 되어 1911년까지 교육의 발전에 열성을 다했습니다. 특별히 종래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방법을 개선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물리학•화학•수학•정치학 등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하였는데, 1892년 3월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 호조참의(通政大夫 戶曹參議)’라는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그의 높은 지위는 선교를 위한 귀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1902-1904년, 한국에는 이상재, 남궁억, 이승만, 신흥우 등 많은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어있었는데, 벙커 선교사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감옥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수감자들을 매주 만나 위로하며 복음을 전하고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수감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려 노력했는데,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신흥우의 아버지는 “옥중에 학교가 설립된다는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죄를 범하고 오랫동안 갇혀있을 때에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책이나 읽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내 아들 흥우가 옥에 갇혀 마땅히 징역을 치를 것이지만, 힘에 겨운 일을 시키지 아니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책을 읽게 하고 글도 쓰게 했다”며 감격하였습니다.
벙커는 1890년 6월 〈한국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1896년 이후 동대문교회에서 목회도 했습니다. 그리고 1905년 9월 11일에는 교파를 초월한 〈한국복음주의선교단체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교회 연합을 지향하는 역사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그의 고백처럼, 벙커는 끝까지 열정적으로 헌신했던 선교사였습니다.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달라.” 1932년 11월 28일, 80세로 숨을 거둘 때 남긴 유언입니다.
비교하지 말라
[본문말씀]
이사야 40: 12∼26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사 40: 25)
[묵상내용]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 중 하나가 ‘비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비교하는 풍토로 둘러싸여있습니다. 비교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악한 기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비참하게 합니다. 학력사회라는 것은 시대의 흐름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수능 성적으로 인생이 결정되고, 명문학교 졸업장이 탄탄대로를 보장해주는 사회구조에서 영혼은 질식해가고 있습니다. 몇 점 받았나요? 몇 평 아파트에 사는가요? 자동차 종류가 무엇인가요? 연봉은 얼마 받아요? 이 비교급 질문으로 억장이 무너지고 슬픔과 분노를 가슴에 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교하는 마음이 동생에 대한 분노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왜 배가 아파집니까? ‘내가 못 가지는 것을 네가 가지는 꼴, 보지 못하겠다’는 놀부 심보가 있어서입니다. 이 마음 역시 비교하는 습성이 만드는 부정적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비교하는 것의 문제는 보이는 것, 손에 쥐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 정직, 진실, 신뢰, 신실, 보람 등 보이지는 않지만 소중한 가치들은 이 비교하는 마음에 눌리거나 밀려나고 맙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우상과 비교하지 말라고 합니다(25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창조와 전능을 선포함으로 하나님만이 신(神)이심을 선언합니다(26절). 이사야의 예언은 죽은 우상을 신으로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질타하며,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촉구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쩌다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우상을 더 능력있게 보았고, 우상에게 빌 때 현실적인 만족이 더 많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함으로써 심판받아 이방민족에게 고난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비교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비교의 유혹에서 자유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오늘 하루 비교하거나 비교당함으로 겪는 고통에서 자유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소서. 우리로 주의 진리 안에 살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에 대한 오해 풀기
[본문말씀]
이사야 40: 27∼31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사 40: 27)
[묵상내용]
이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으로 인해 고난을 겪게 되었을 때, 그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고 힘이 없고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난의 원인을 자신의 잘못에서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으려 한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고쳐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31절).” 얼마나 힘이 있는 말씀입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백성을 절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오히려 고난과 역경과 시련에서 소망이 되시며, 능력이 되시며, 힘이 되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어려움을 겪게 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심을 말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시련을 이겨낸 사람이 있습니다. 헤롤드 러셀입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부상으로 두 팔을 잃었습니다. 러셀은 의족을 한 채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합니다. 시상식에서 러셀은 상금을 상이용사를 위한 자선사업에 기부하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것을 계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고 헤아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시상식에 참석했던 이들은 그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하여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있느냐?”고 소리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단지 우리들이 바르게 믿지 못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고난에서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주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심을 우리가 믿게 하소서. 아멘.
지렁이 같은 야곱?
[본문말씀]
이사야 41: 8∼16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 10)
[묵상내용]
지렁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엔 지렁이를 친환경적인 동물의 으뜸으로 여깁니다. 지렁이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흙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살아있는 토양입니다. 지렁이는 흙 속의 온갖 공해물질을 먹어 정화하고, 땅 속에 이리저리 굴을 파면서 살아, 공기 중의 산소를 흙에 공급합니다. 가정에서 배출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분해하여 식물의 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합니다. 지렁이야말로 생태계를 살리는 유익한 일을 합니다. 모양은 징그러워도 하는 일을 보면, 온갖 공해 물질을 양산하며 하나뿐인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인간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지렁이’는 약한 존재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왔습니다. 역사 속에서는 억압당하면서도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다가 밟으면 그대로 밟혀 죽고 마는 백성의 애환을 지렁이의 꿈틀거림으로 해석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속담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이사야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버러지 같은 너 야곱”으로,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으로 표현되어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보다 더 징그럽게도 “구더기 같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게 짓뭉개진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렁이 같은 이스라엘에게 산(山)을 부스러기로 만드는 엄청난 일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같이 만들 것이라(15절).”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의 표현입니다. 약한 사람을 들어 새 역사를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입니다. 실제로 현미경으로 보면 지렁이에게는 6,000개의 이(齒)가 있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땅 끝에 있을 때에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십니다.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는 고난 속에서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우리를 시련 속에서 구해주소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소서. 아멘.
십자가를 통한 축복
[본문말씀]
에베소서 2: 11∼22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 13)
[묵상내용]
당신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어떤 중요한 사람과 불편한 관계에 있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 간에도 관계가 잘못 되면 힘들고 괴로운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불화관계에 있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진정한 축복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아갈 소망이 전혀 없는 존재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냥에 팔리게 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셔야만 했습니다.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도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화목을 이루게 하십니다.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과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불화 가운데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서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미워하고 해치고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러한 미움과 악함의 장벽도 깨뜨려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의 분단과 함께 동서의 분열, 노사 간의 갈등, 부모형제 간의 불화, 부부 간의 불화 등 나라와 사회, 가정 전반에 걸쳐 분열의 악한 영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어느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통한 ‘하나됨’의 축복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새롭게 경험하고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왔던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걸어다니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의기도]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게 하여주소서. 아멘.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사람
[본문말씀]
이사야 42: 1∼17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 3)
[묵상내용]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여 세우신 축복된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세상 나라와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짐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시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자 하셨습니다.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인데, 그분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권세를 휘두르는 권력자가 아니라 섬기는 종이요 고난받는 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력한 구원자를 기다리는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우리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은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셨으며, 상한 갈대처럼 연약한 자들과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불쌍한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당신께서 그 모든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로 인류의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이루고자 하셨던 인류구원의 역사를 오늘 우리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생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성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예수님처럼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어 남의 발을 씻길 수 있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전파에 힘써,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저도 예수님 가신 그 길을 걸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
두려워말라. 너는 내 것이라
[본문말씀]
이사야 43: 1∼13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 1)
[묵상내용]
사람들은 자기 자녀와 자기 가족, 자기 집과 자기의 소유에 애착을 갖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남의 것에 손대는 것에는 그다지 관여를 하지 않지만, 나의 것에 남이 손대거나 하면 가만히 있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여호와께도 이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귀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능력의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봅시다. 그러면 오늘의 말씀이 바로 나 자신에게 하신 말씀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절)”고 하십니다. 우리가 전에는 마귀의 소유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하거나 괴롭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종종 우리를 두려움에 빠뜨려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하고 무능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드는 전략을 씁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육을 따르는 생활을 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롬 7: 25). 그러나 우리 앞에 어떤 두려운 환경이나 상황이 놓여있다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보호자요 인도자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때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감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함께하시고 돌보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항상 승리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메리 스크랜톤 Mary F. Scranton, 1832-1909, 미북감리회
[본문말씀]
[묵상내용]
구름 뒤에는 찬란히 다시 빛날 태양이 숨어있는 법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에서 희망의 문을 여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선교사가 있으니, 바로 메리 스크랜톤 여사입니다. 그녀는 40세에, 사랑했던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개신교 선교사업이 태동할 때에, 하나님은 그녀를 위로하시며 미감리교회 한국최초의 여선교사로 세우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녀의 아들 역시 미감리회 한국최초의 의료선교사로 부르심으로써 복에다 복을 더하신 것입니다.
1885년 6월 20일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곧 정동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준비하며 여성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886년 5월 31일, 자신의 거처에서 한 명의 여학생을 놓고 교육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가난한 고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즉시 내 비좁은 사실에 한 명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라는 당시 그녀의 기록이,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교육의 태동을 담담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보수적인 폐쇄성 때문에, 그녀의 초기 여성교육은 뛰어넘어야 할 난관이 많았고, 그에 따른 고통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1887년 학생 수는 7명으로 증가하였고, 명성왕후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음으로써 본격적인 여성교육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 5월 31일, 이화학당은 창립 35주년 기념식에서 그녀의 여성교육을 향한 일념과 그 공로에 대해 이렇게 치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회가 도원의 봄꿈을 깨지 못하고 여자의 새 교육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때에, 푸른 바다 수만 리 묘망한 바다를 건너온 손님, 노랑머리 푸른 눈의 미국사람 시란돈(스크랜톤)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각 지역에 여성교육기관을 마련하고 여성 계몽운동의 선봉에 섰던 스크랜톤 부인은 교육 이외에도 전도활동에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녀는 서울은 물론 소원, 장지내, 도고개, 오산, 여주, 이천 등 여러 지역에 전도활동을 전개하였고,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77세에 별세한 그녀가 힘쓰며 눈물로 뿌려놓았던 씨앗은, 바로 지금도 수많은 학교와 교회에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본문말씀]
사 44: 6∼8, 21∼23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 44: 8)
[묵상내용]
〈○○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편은 〈브루스 올마이티〉이고, 2편은 〈에반 올마이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며, 우리의 왜곡된 신앙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들입니다.
1편은, 자신의 생활을 비관하며 신이 자신만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이, 신으로부터 전지전능한 힘을 받아 자기 동네에서 신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지만, 세상사람들은 다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해집니다.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는데, 단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2편인 〈에반 올마이티〉는 현대판 노아의 이야기입니다. 뉴스앵커에서 하원의원이 된 주인공에게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온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는 황당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했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이 두 영화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단순히 성경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믿음에 도전합니다. 1편이 올바른 기도의 의미에 대해서 가르쳐준다면, 2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의 순종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유 없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셔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6절).”
하나님께서는 헛된 물질과 명예와 다른 신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입장에 하나님을 맞추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 10: 27).”
[오늘의기도]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욕심과 욕망에 하나님을 맞추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인도하소서. 아멘.
세상의 헛된 것들을 버리고
[본문말씀]
이사야 44: 9∼20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사 44: 9)
[묵상내용]
『콩쥐 팥쥐』라는 동화를 읽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팥쥐와 그 어머니가 잔칫집에 가면서 콩쥐에게, 잔치에 따라오려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시킵니다. 콩쥐는 항아리에 열심히 물을 길어 부었지만 항아리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항아리는 밑 빠진 항아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나 항아리에 난 구멍을 막아주었고, 콩쥐는 그 덕에 잔칫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일종의 항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항아리에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항아리에는 수많은 구멍이 나있어서, 아무리 좋은 선물을 채워도 결국엔 새나가고 맙니다.
왜 항아리에 구멍이 생기는 걸까요?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욕심과 고집 그리고 돈과 명예욕과 정욕과 같은 우상들을 세우고 그것들을 섬기고 앞세우면, 항아리에 구멍이 생겨 주님이 주시는 축복과 선물을 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삶을 망가뜨립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죄와 싸우되 피 흘릴 때까지 싸우라고 권면합니다(히 12: 4).
죄 때문에 생긴 구멍을 막는 장치가 바로 기도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콩쥐 팥쥐』에 나오는 두꺼비와 같습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를 나누면, 주님은 우리 죄 때문에 생긴 구멍을 막아서 새롭고 온전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만일 죄를 지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항아리에는 무수한 구멍이 생길 것이며, 우리의 삶은 멸망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항아리에 구멍이 뚫려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봅시다. 헛된 우상들로 인하여,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소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헛된 것들을 구하지 말고, 올바른 소망을 품고 오직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도록 도우소서. 아멘.
[본문말씀]
이사야 44: 24∼45: 7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 4)
[묵상내용]
여러분은 이슬람 문화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몇 년 전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이슬람 문화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영화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유대인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시키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영화가 유대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히 이슬람 문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그 영화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유대인들이…?” 결국 이러한 호기심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보게 만들었고 이 영화를 통해 많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성과 상식으로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도 자신의 기준 안에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으십니다. 아니, 인간들이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법들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바사의 왕 고레스 역시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해방을 소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이 아닌 다른 이방민족의 인물을 도구로 이용하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모든 세상의 주권이 하나님 아래에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인 피조물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어려우십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에 따라 은혜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지금의 성공을 나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교만에 빠지지 맙시다.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받아 제대로 쓰여지고 있는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의지하며 그 은혜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며,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이사야 45: 8∼17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 9)
[묵상내용]
하나님은 종종 당신과 인간을 토기장이와 질그릇 조각에 비유하십니다(사 29: 16, 30: 14, 41: 25, 64: 8, 렘 18: 2∼6, 롬 9: 21). 본문도 흙을 자기 마음대로 여러 모양으로 빚을 능력과 권한이 있는 토기장이와 본래 한 줌의 흙덩어리에 불과한 토기 조각을 극적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구워 만든 그릇, 쉽게 깨지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진흙에서 그릇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집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위치도 삶의 목적과 용도도 모두 바뀌었습니다. 주인을 위하여 합당하게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 불평을 그쳐야 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 감히 도전하거나 항거할 수 없으며, 불평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화와 복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하여 단호하게 경고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장래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유다를 구원하실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구원하실 구체적인 방법으로 고레스의 등장을 말씀하십니다. 땅 위의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시비를 걸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요, 인간의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12절). 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분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포로생활)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숨어계시는 것같이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경영하시며,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시는 분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 29).”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외에 우리가 경배할 대상은 없습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모든 어리석은 생각과 불평을 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본문말씀]
이사야 45: 18∼25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 22)
[묵상내용]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신 대로 공의를 행하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행하겠으니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구원하시되, 확실성이 있는 언약의 말씀을 세우시고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불능의 힘을 가지셨으므로 택한 자를 구원하시되,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환난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들을 구원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예루살렘을 고레스를 통하여 회복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종말에도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국에 처한 백성들을, 동방사람을 들어서 구원해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구원을 실제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공의를 말씀하셨다 하여도 친히 행하시는 일이 없다면 그것이 인간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어려운 환난이 왔을 때 하나님은 ‘네 힘만으로 이겨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환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구원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두고 맹세하시고 그대로 행하십니다. 우리는 무소불능의 하나님께서 맹세하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권위 아래서 여호와를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맹세를 세우고 그대로 행하지를 못한다면 그 자녀들 앞에서 주권이 상실되므로 권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세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확실한 것이 더러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같은 확실성은 없을 것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24절).” 공의를 행할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에게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자기에게 절하는 고넬료에게 말했듯 사람은 그 누구나 사람일 뿐입니다(행 10: 26). 우리는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말씀한 대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모든 열방이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저희가 알도록 도우소서. 아멘.
[본문말씀]
이사야 46: 1∼13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 4)
[묵상내용]
본문은 바벨론이 멸망하면서 벨(바벨론의 주신)과 느보(벨의 아들신)가 엎드러지겠다고 예언합니다(1절). 우상은 나라를 지키지도 백성들의 형편을 개선하지도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상이란 아무런 능력이 없는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혹 일순간 숭배하는 자에게 안도감을 줄지 모르지만, 우상은 사람에게 계시도 훈계도 평안도 기쁨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어깨에 업혀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신에게 복종을 표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장부가 되라(8절)”는 말씀은 어리석고 무가치한 우상숭배행위를 과감하게 청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섬길 때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마치 부모님과 같아 우리를 품에 안으십니다.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욕심을 잉태하고 죄에 빠지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하나님의 마음은 무너져내립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신(神)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기의 품에 안으시고 사랑하신 분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거역하는 자를 우리는 패륜아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방의 고레스를 사용하셨습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상징하면서 궁극적으로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고레스를 불러오신 것처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이미 세워져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져왔으며, 앞으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상을 헛된 것으로 만드시며, 세상 열방의 강력한 군주 고레스조차도 손에 들고 사용하시는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끝내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백발이 되기까지 인도하시고 품에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백발이 되기까지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게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본문말씀]
[묵상내용]
윌리엄 스크랜톤 선교사는 바로 지난 주 살펴보았던 메리 스크랜톤 대부인의 아들입니다. 윌리엄 스크랜톤은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어머니와 함께 해외선교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1884년 미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85년 5월 3일 최초로 서울에 도착한 감리교 선교사가 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내한 즉시 스크랜톤은 북장로회 선교사 알렌이 경영하는 제중원에서 함께 의료사업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크랜톤의 열정은 단순한 의료사업으로는 만족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차차 전도자로서의 열망에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스크랜톤은 후에 자신의 초기 선교사업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복음을 위한 문을 여는 하나님의 열쇠로서 의술활동을 하였다. 나는 곧 이미 넓게 열려진 문의 자물쇠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의료사업을 떠나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의료선교와 복음전도를 병행하며 동분서주하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1885년 6월 20일, 그는 정동에 선교부 주택을 구입하고 9월 10일, 정동병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이후 병원이름을 시병원으로 고치고 그 시설 규모를 확장하였습니다. 1887년이 되자, 스크랜톤은 다시 정동 시병원을 상동으로 옳겨 상동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892년부터는 상동병원 내에 상동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가 되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전신인 부인 전문병원(보구여관)의 설치를 제안하고, 또한 운영하면서 초창기 여성의료사업의 발전에 큰 기여했습니다.
스크랜톤을 의사에서 복음을 전하는 의료선교사로 이끄셨던 하나님께서는, 한국선교의 문을 활짝 여시기 위해 그의 지경을 다시 한 번 넓히셨습니다. 스크랜톤은 초기 미감리회 선교부의 회계를 거쳐, 미감리회 한국선교 전체를 지휘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 경기도 일원의 선교구역에서는 감리사로 크게 활약하였습니다.
[본문말씀]
이사야 48: 1∼11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 9)
[묵상내용]
예언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무감각하거나 우리와 멀리 떨어져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언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또한 우리가 만난 어떤 인간보다도 열정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고 친밀한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1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굳어있어서, 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4절).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꼭 들려주고 싶었던 중요한 말씀을 하기 원하셨습니다(5∼6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화내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9절). 그것이 하나님이 꼭 하고 싶으셨던 너무도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너무도 하고 싶으셔서 어쩔 줄 몰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결점 많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아픈 마음으로 슬퍼하시지만, 자신의 백성을 교훈하기 위해 때로는 고난의 풀무도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9절).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렘 9: 7)”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슬퍼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멈추시지 않으시고, 이처럼 말썽 많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1절). 남은 자를 회복시키고, 그분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며, 구원자를 보내시며, 마른 뼈 무더기에 생명을 불어넣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매번,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언제나 사랑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시고, 화내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어서 반복적으로 말씀해주시는 이 중요한 말씀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소망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끝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항상 되새기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본문말씀]
이사야 48: 12∼22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사 48: 17)
[묵상내용]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길과,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고 떠나는 길은 전혀 다릅니다. 목적지를 분명히 알 뿐만 아니라, 그곳에 가보았던 사람과 함께 가는 길은 정말 든든합니다. 길을 가며 걱정하거나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변의 경치를 즐기며, 친구와 즐겁게 이야기 나누며 갈 수 있습니다. 반면, 처음 가는 길을 혼자 가는 것은 정말 두렵습니다. 긴장하게 되고, 혹시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17절). 하나님의 인도가 이처럼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12∼13절). 하나님이 인도하시기에 그 길은 형통한 길입니다(15절). 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이스라엘은 그 험한 사막 길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고,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얻는 놀라운 일도 경험했습니다(21절).
우리는 자주,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른 분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거룩’이라는 단어는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으로 삼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당신이 만든 피조물과도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도하시기에 그분과 함께 걷는 길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신뢰할 만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아시고 또 우리 인간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정확히 아시기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시고, 인도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길을 가도록 항상 하나님께 우리의 귀를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길로 기쁘게 가야 합니다. 그 길이 형통의 길이고, 평강의 길입니다.
[오늘의기도]
우리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합니다. 그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이사야 49: 1∼12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 49: 5)
[묵상내용]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의 열쇠 중에서 첫 번째로 꼽는 것은 칭찬이라고 합니다. 칭찬은 그 사람의 능력을 100% 발휘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칭찬은 ‘나는 존중받고 있구나, 나는 의미있는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이구나’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하고 어려움도 잘 극복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한 자’로 보십니다(5절). 하나님은 매번 하나님을 저버리고 딴 길로 가는 우리를, 여전히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온 세계로 구원 얻게 하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6절).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시고 들어주십니다(4절). 우리를 정말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항상 하시는 말씀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 22)”라는 것인데, 우리는 이 음성을 쉽게 무시하거나 잘 듣지 못합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에 빠져서 그렇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의 영향으로, 비교의식과 모자람에 대한 불평 때문에 이 소중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 어떠하며,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처럼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해 본문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하면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우리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또 더위와 볕에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신다고 말씀합니다(10절). 결국, 하나님의 것을 유업으로 받을 자가 바로 우리라고 말씀합니다(8절). 혹 사람들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 나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은, 신앙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녀’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한 자로 보시고 또 우리의 삶에 힘이 되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참된 삶의 목적과 비전을 발견하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이사야 49: 13∼2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 16)
[묵상내용]
요즘 우리는 핸드폰에 전화번호부를 다 입력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단축번호 1번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일 것입니다. 아직 어린 자녀들은 엄마나 아빠가 1번일 것이고, 애인이 있는 사람들은 그 애인의 번호가, 부부 사이에는 남편 혹은 아내의 번호가 1번일 것입니다. 친밀하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지요. 친밀함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요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알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나를 그의 소중한 사람 1번에 저장해놓은 것을 알았을 때, 혹은 그런 고백을 직접 들었을 때, 우리는 ‘헉!’하고 숨도 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벅찬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한없는 친밀함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참으로 오랫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은, 포로생활의 어려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괴로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확신의 말씀을 계속해서 주고 계십니다.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16절).” 진한 감동으로 숨을 쉬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핑 돕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진한, 더 확실한, 더 강한, 더 숨김없는 애정표현이 있을까요? 핸드폰이 아무리 내 손 안에 있더라도, 아무리 가깝게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은 내 몸의 일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종종 손바닥에 기록합니다. 메모지도 없어질 수 있고 핸드폰도 잊고 나올 수 있지만, 내 손은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손바닥은 무엇을 하더라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도 없이 손을 펼 때, 우리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바로 손바닥입니다.
내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있습니다. 그것도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비누칠을 해도 샤워를 해도 목욕을 해도 지워지지 않도록, 꼭꼭 새겨져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무시는 곳에 내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이토록 우리와 친밀하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황폐한 일상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며, 나를 늘 지켜보고 계심을 알게 하소서. 아멘.
사도행전 4: 13∼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 31)
[묵상내용]
경북대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다가 스님이 되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여러 가지 비리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교계를 정화시켜보겠다고 앞장서다가 그만 비리와 사기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승려가 감옥에 들어가니 감옥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담당한 교도관에게 불경을 요구했는데 성경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내가 절의 중인데 왜 성경책을 주냐”고 묻자, 교도관이 하는 말이 “불경이 다 대출되어서 심심할 것 같아 성경책이라도 읽으시라고 가져왔습니다”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쟁이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한 번 보자’ 하면서 그 성경책을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한참 읽다가 그는 누가복음 7장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불경에서도 봤었는데, 그 마지막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부처는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는 과부를 향해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인연에 따라 태어났다가 인연에 따라 없어질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하고서 과부를 그냥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승려는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석가모니가 위대하고 불교가 위대해도 인간 실존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 한계를 뛰어넘으셨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고 마침내 그는 출소하여 승복을 벗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김성화 목사(기독교대한감리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변화를 받고 성령충만을 얻게 됩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본문에서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얻고 감동을 받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성령충만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 시대의 사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