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이사야 50: 4∼9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 4)
[묵상내용]
본문에서 ‘학자’로 번역된 단어 ‘리무딤’은 본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제자’ 혹은 ‘학생’이란 단어가 더 적합합니다. 한자의 ‘學者’도 사실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학자’란 ‘가르치는 자’ 이전에 먼저 ‘가르침을 받는 자’인 것입니다.
누구의 가르침일까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말할 수 있게 하시고, 들을 수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인 것입니다. 아침마다 들을 수 있도록 깨우쳐주시는 하나님의 열성과 귀를 열어주시는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종은 최선을 다해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말로 위로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말하는 사람’ 이전에 ‘듣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고난을 당했을 때 굳건히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말할 때가 더 많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메마른 저수지처럼 ‘말씀의 고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기보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에 더 집중하고, 아침마다 귀를 열어주시고 깨우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면, 지치지 않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벽예배나 아침 말씀 묵상, 가정예배를 매일매일 드리는 것같이 좋은 것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이 일상화되면, ‘말씀에 힘이 있다’는 진리를 삶에서 실감하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말씀과 일상의 삶이 대화를 하고 서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 따로 우리의 삶 따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삶이 더 이상 나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내게 됩니다(7절).
[오늘의기도]
하나님, 무엇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존재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부족하고 우리의 생각은 늘 자기중심적이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로 늘 ‘배우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이사야 51: 1∼8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 6)
[묵상내용]
이스라엘 백성이 자리하고 있던 땅은 포로로 잡혀와서 사는 땅이었고, 그 햇수는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 알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마른 뼈와 같이 말랐으며, 그들의 하나님은 포로들의 하나님으로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있으면 왜 너희를 구하지 못하느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땅에서 흔히 듣던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버렸나 보다’ 하며, 아무 희망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 듣기를 간곡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렇게 아무 힘도 없이 자신들을 포로로 방치해두는 힘없는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바로 그 하나님이 만백성의 빛이 되시고, 그의 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으며, 그가 능력으로 뭇 백성들을 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들을 호령하고 지배하는 그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땅이 옷처럼 해어지며, 하루살이같이 죽을 것이고, 다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구원만이 영원하고, 그 하나님의 의만이 꺾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것 같고, 오직 바빌론이라는 강한 힘만이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잠시잠깐 너희의 잘못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너희의 구원이 임박했다’는 말씀을 붙들고 이제 이스라엘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일 포로기의 이스라엘처럼 아무 희망도 없이,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같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때야말로우리가 하나님의 이 위로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지금 나에게 막강한 힘을 미치고, 나를 억누르는 어려움이나 어떤 세력이 있다 해도, 오직 하나님만이 그 세력에서 나를 빼어내서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위로의 하나님, 세상에는 이런저런 달콤한 위로가 있지만, 그것은 나를 참으로 위로하지 못합니다. 나를 더욱 갈증나게 하고, 더욱 깊은 괴로움으로 몰고 갑니다. 오직 참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깊이 깨닫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묵상내용]
양화진 제1묘역에는 한국감리회 최초의 선교사이며,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선교사의 비문이 배재동창회에 의하여 건립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는 그의 아들이며 배재학당 교장과 재단 이사장으로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교육한 헨리 닫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1889∼1953) 선교사의 묘가 있습니다. 한편 이곳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한국에서 백인 선교사의 첫 자녀로 출생하여 이화학당 제6대 교장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학장으로 교육에 헌신하였던 H. G. 아펜젤러의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가 안장되어있습니다. 이들 묘비의 상단에 새겨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라는 성구가 실로 한 가족을 통해 보여진 것입니다.
H. G. 아펜젤러는 1884년 미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도착했을 때 다음과 같은 첫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 아펜젤러는 우선, 교육활동에 자신의 혼을 쏟았습니다. 1886년 6월 8일 배재학당을 창설한 것이 그 예시입니다. 배재(培材)학당은 고종 임금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887년 10월 9일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고,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였으며,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시행하고, 벙커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성서번역사업과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년 2월)하여 당시 한문(漢文) 위주의 사회에서 한글을 장려하는 등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사회를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아펜젤러야말로, 한국의 교회, 교육,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선구자의 사명을 짊어진 개척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을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의 사고로 1902년 6월 11일 밤 순직하였습니다. 그러나 J. S. 게일 선교사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하였듯,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한국교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오늘의기도]
[본문말씀]
히브리서 1: 1∼14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 3)
[묵상내용]
“히브리’란 말은 ‘건너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건너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히브리서는 편지형식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하여 권면의 말씀을 주는 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지니셨음에도 불구하고 천사들보다도, 모세보다도, 여호수아보다도 우월하심을 증거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영광’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며,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본체’란 사물의 하부에 있으면서 그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실체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본체의 본질’ 즉 하나님의 본질이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나타나있어서, 성자 하나님을 볼 때 성부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만물’은 모든 피조물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자로서 자신의 능력있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을 유지시키며 인도하십니다.
다음으로 그분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자기 피로 단번에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도말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높은 곳에 계신 이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시 110: 1). ‘높은 곳에 계신 이’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심으로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처음과 마지막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저항할 수 없는 위엄이십니다. 성육신과 고난을 통해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고통을 체휼(가여워하심)하시어 중보자가 되시며, 세상에 그 어떤 존재보다도 위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의기도]
주여, 오늘도 위대하신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히브리서 2: 1∼10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 3)
[묵상내용]
어느 추운 겨울날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성 프란시스가 거주하고 있는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프란시스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그는 간청하였습니다.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게 해주십시오.” 프란시스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저녁을 먹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환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너무 추우니 알몸으로 저를 녹여주십시오.” 프란시스는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환자의 몸을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프란시스가 일어나 보니 함께 누웠던 환자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어젯밤 함께 누웠던 환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처럼 비천한 사람을 손수 찾아와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드린 기도가 유명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큰 구원’이란 나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 큰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 확증되었습니다. 그 큰 구원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분주함으로 인하여 그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큰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큰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면서도 실제 삶 속에서 그것을 지나쳐버리기 일쑤입니다. 이제 우리는 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능력 안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기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큰 구원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히브리서 12: 1∼14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 2)
[묵상내용]
히틀러에게 대항하다가 옥중 이슬로 사라져간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D. Bonhoeffer)는‘값싼 은혜’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천적이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배워서 알기는 하여도, 그 진리를 삶에 적용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처형당하기 아홉 달 전 그의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고난받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비유로 표현하기를, 달리는 경주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1절). 그러면서 “예수만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몇 가지의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영적 장애물을 제거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장애물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이 땅에는 달리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어둠의 요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별것 아니라고 죄를 방치하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의 초점을 흐리게 합니다. 그것은 방향 없이 경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초점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믿음의 창시자, 믿음의 근원, 믿음의 본체가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살 때 온전해질 수 있으며, 세상의 것으로 인하여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경주자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인내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한과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의 표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개인의 믿음을 위한 인내라는 소극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도리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인내하는 적극적인 차원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예배와 찬양의 초점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하게 합니다.
[오늘의기도]
예배와 찬양의 초점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삶을 집중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디도서 1: 1∼16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딛 1: 10∼11)
[묵상내용]
교회와 나라가 어지럽게 될 때 정직하고 진실한 일꾼이 있어야 합니다. 거짓 지도자들을 막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장로로 세워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서기에 합당하고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여야 합니다. 장로들은 성경이 가르친 교훈 및 전통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그 가르침을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킴으로 다른 사람에게 바른 교훈으로 권면할 수 있고 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레데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전했습니다. 둘째,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익이 없는 공허한 말로는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셋째, 속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에서 떠나 점점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넷째, 그들은 더러운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을 가르쳐 하나님께 인도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데 있었습니다. 다섯째, 그들의 가르침은 파괴적이어서 평온한 가정을 분열시키고 파괴시켰습니다. 여섯째, 그들은 양심이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양심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과 양심으로 결정한 모든 것은 더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거짓 교사들로 혼란에 빠진 그레데교회를 수습하고 신실한 장로를 세워 교회를 잘 다스리고 그들이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디도서를 기록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된 그레데인들을 꾸짖어 바른 진리에 세우고 그리스도인으로 정결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디도의 사명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교회나 거짓 교사들로 인해 진리가 흔들리게 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을 따라, 믿음을 떠나 타락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고, 거짓 교사들의 입을 막고 경계해야 합니다. 신실한 믿음의 일꾼들을 세워 교회를 튼튼히 세워나가고 바른 신앙으로 깨끗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의기도]
진리의 근원 되신 하나님, 어둠과 거짓이 많은 세상에서 깨어 기도하며 거짓 교사들을 물리치고 진리의 빛 안에서 의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디도서 2: 1∼15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 14)
[묵상내용]
바울은 디도서 2장에서 교회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가지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남녀 노인들의 경건한 생활, 남녀 젊은이들의 경건한 행동, 그리고 종들의 경건한 생활지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벧전 2: 18∼25).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들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근신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쾌락이나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 부도덕한 행위와 우상숭배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 자유는 방종이나 나태가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취할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은혜의 복음과 성도의 의로운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둘째, 복된 소망 즉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행 24: 15). 만왕의 왕, 영광과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딤후 4: 1, 8). 이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담대하고도 의롭게 살아가게 됩니다(롬 5: 21). 그날에 하나님은 온 세상을 평화와 공의로 다스리시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11: 3∼5).
셋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순종하고 그 영광을 위해 모든 일에 열심을 다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엡 5: 26).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신분에 맞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 곧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고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은혜로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품성을 닮고, 믿음으로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디도서 3: 1∼15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딛 3: 1)
[묵상내용]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시민입니다(빌 3: 20). 동시에 육적으로는 사회의 일원으로 한 국가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일반시민과 똑같은 권리와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바른 삶의 태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첫째,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1절). 예수님도 하나님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구별하시며, 지상의 나라에 세금을 내고 국법을 지켜야 할 것을 인정하셨습니다(마 22: 21).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와 사회의 복지를 위하여 이바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제도에 복종하는 모범을 보이는 동시에, 국가를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사모합니다. 때로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저항하여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8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선한 일에 힘쓰고 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딤전 6: 18).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선행에 힘쓰는 것은 성도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끼치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셋째, 불의를 멀리해야 합니다(9절). 바울은 어리석은 변론, 족보이야기, 분쟁,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무익하고 헛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족보나 율법에 대한 다툼은 초대교회에 많은 혼란과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생명력이 없는 행위들은 어리석고 헛된 것입니다. 의를 행하게 될 때에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되고 복음적 신앙으로 사는 자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삶은, 정의로운 집권자에게 복종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선을 행하며 불의를 멀리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법을 준수하고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마 5: 13∼16).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모범이 될 때 사회는 보다 순화되고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으로 법을 준수하고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여 하나님나라를 확장해가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묵상내용]
우리나라 국보 1호인 남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남대문은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한국최초로 발행된 크리스마스씰의 도안이 남대문이었던 것이 그 예입니다. 당시 결핵은 거의 불치병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이 당시 현실을 말해줍니다.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 사람 꼴인데 한국에서는 5명 중 한 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 이처럼 결핵의 치료를 위해 애쓰고 헌신한 선교사가 바로 셔우드 홀 선교사입니다.
셔우드 홀은 평양지역 의료선교사였던 윌리암 홀(William J. Hall)의 2세로서,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교육을 위해 캐나다로 건너가 1923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뉴욕 홀츠빌 서퍼크 결핵요양소에서 결핵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1925년 8월 미국감리회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9일 내한하였습니다. 1926년 7월에는 해주 구세병원 원장, 운산금광 담당의사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1928년 10월 27일 한국 최초로 폐결핵 퇴치를 위한 ‘해주 구세요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홀의 의료선교의 공로를 인정하여, 1984년 한국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울시는 명예시민증을 수여했습니다.
그의 부인 메리안 B. 홀(1896-1991) 역시, 남자의사들이 거절한 마당에 만삭인 몸에 위험을 무릅쓰고 추운 겨울밤 시골을 찾아가 앓고 있는 청년의 생명을 구할 정도로 헌신적인 선교사였습니다. 그녀의 고백은 실로 우리를 뜨겁게 합니다. “요양원 설립 10주년을 맞는 오늘, 감회 깊게 시작 당시의 그 어려움들을 되돌아본다. 마치 신비한 힘으로 모든 게 이뤄진 것같이 느껴진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었고 그 꿈에 성실히 매달렸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성취시켜주셨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은 친구들을 통해 도와주셨고, 우리의 온갖 난관은 극복되었다. 이제 이곳은 절망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는 장소가 되었다.”
[오늘의기도]
[본문말씀]
히브리서 2: 11∼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 18)
[묵상내용]
한 소년이 사고로 오른팔을 잃었습니다. 낙심한 소년은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보다 못한 아버지가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잘 아는 목사님이 계신데 아주 훌륭한 분이란다. 모셔올 테니까 한 번 만나보겠니?” 소년은 즉각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목사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오는 목사님을 보고 소년이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목사님도 자신과 같이 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양쪽 팔이 모두 없어서 빈 소매만 펄럭였던 것입니다. “나는 두 팔이 모두 없단다. 어릴 때 사고로 잃어버렸지.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그것을 감사하고 있단다. 내가 그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나처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위로해줄 수 있거든.” 결국 소년은 자신의 불구를 가슴 깊이 이해하는 목사님과 친해지게 되었고, 절망에서 벗어나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소년의 옆에만 있어도 큰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의 힘이요, 도움이요, 구세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몸소 고난을 당하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때때로 배고파하시고, 눈물 흘리시고, 지친 몸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사탄의 유혹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는 말할 수 없는 인간적 갈등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고난과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받는 시험과 환난을 다 이해하시며 친히 도우십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절).”
지금 인생이 고통스럽습니까? 그래도 고통을 가져다주는 환경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나의 고통을 아십니다. 나에게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33).”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20).”
[오늘의기도]
사랑의 하나님! 때때로 환난을 만나고 시험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이기게 하여주소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여주소서. 아멘.
[본문말씀]
히브리서 3: 1∼1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 1)
[그림QT] 십자가 묵상
등대
[묵상내용]
어느 목사님이 예수 믿지 않는 농부 집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일어난 농부가 목사님을 닭장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여길 보세요.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목사님이 닭장 속을 들여다보니 암탉이 한 마리 앉아있었습니다. 그 암탉의 품속에서는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탉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암탉은 왜 꼼짝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농부는 암탉 뒤에 뚫린 구멍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잘 보세요. 족제비라는 놈이 밤중에 몰래 와서 이 어미 닭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때 암탉은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미닭은 자신이 품고 있는 병아리들 때문에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앉은 채로 살이 뜯기고 피를 다 빼앗기며 죽어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목사님이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지만 저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기꺼이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님은 죄 많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일한 모세는 존경하면서도, 하나님의 집을 유업으로 맡아 다스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모세에게는 영광을 돌리면서도, 예수님께는 전혀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천군천사들을 동원하여 마귀의 하수인 노릇하는 자들을 다 쓸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뺨을 치고 침을 뱉으며 모욕하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만이 전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묵묵히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보답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저희는 너무도 종종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잊고 살아갑니다. 용서해주소서. 다시 한 번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게 하여주소서. 아멘.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본문말씀]
히브리서 3: 12∼19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 13)
[묵상내용]
기독교의 고전 『천로역정』을 쓴 영국의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어느 날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습니다. 무척이나 활동적이고 정열적이었던 그에게 감옥은 참을 수 없이 답답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창살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 자유를 주소서.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런데 하루는 그가 감옥의 창살을 붙잡고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 9).” 세 번씩이나 똑같은 음성이 들려오자 번연은 즉각 무릎을 꿇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비록 감옥에 있지만 이것이 내게 족한 은혜구나.” 그 일이 있은 후 번연은 감옥에서도 기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묵상과 감사 속에서 유명한 『천로역정』을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존 번연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괴로움을 감사로 바꾸고 큰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괴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정과 생각을 복종시킵니까? 아니면 도리어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강퍅해져서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고 크게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은혜를 받고 큰 복을 누리지만, 심령이 강퍅하여 말씀을 거역하고 불평하면 패배밖에 없습니다.
본래 ‘강퍅하다’의 헬라어 ‘스클레뤼노’는 ‘말라서 단단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강퍅하다는 말은 우리의 심령이 말라서 단단해진 것처럼 완악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심령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스스로 그 머리에 타는 숯불을 얹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할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복과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이 강퍅케 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아멘으로 순종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참 안식을 소망합시다
[본문말씀]
히브리서 4: 1∼10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히 4: 9)
[묵상내용]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천당과 지옥을 설교하시던 선생님을 보면서 천당에 있는 나를 그려보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착한 어린이가 되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크면서 지옥도 천당도 점점 희미해져갔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에 관심이 더해질수록 천당은 내게서 한 걸음 떨어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죽어서 가는 곳이며 믿는 자는 누구나 들어간다는 그곳, 하지만 천당에 대한 어릴 적 꿈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멀게만 여겨지던 천국이 내 앞에 있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누추할 때 천당을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이 힘들어지면 천국을 꿈꾸곤 합니다. 또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외침을 들을 때 또 한 번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 말의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생각할 때면 아이들이 부르는 찬양을 떠올립니다. ‘돈으로도,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믿음으로,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나라에 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약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말씀을 우리들은 사랑과 축복으로 들어야 합니다. 천국은 참 안식을 누리는 안식처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10절).” 세상은 우리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알게 됩니다. 죄와 악이 가득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평안, 기쁨, 영광, 행복 등 우리의 원하는 것들을 온전하게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처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은총의 말씀을 하십니다. 믿는 자는 그 안식처에 들어가게 된다고 매우 값진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참 안식을 천국에서 누리기를 꿈꾸며 믿음을 굳게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 천국 약속을 소망하면서 은총을 받으며 열심히 믿읍시다.
[오늘의기도]
말씀으로 천국을 약속하신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주소서.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어 참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믿는 일에 용기를 내십시오
[본문말씀]
히브리서 4: 11∼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 16)
[묵상내용]
예레미야 35장에 레갑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로 깨닫게 합니다. 그들은 비록 광야에 살더라도 신앙의 삶을 버릴 수 없다면서 결의를 굳게 합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후손인 레갑인들은, 요나답이 하나님께 받은 가훈을 지키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렘 35: 19).” 하나님은 우직하게 순종하는 그들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신앙은 순종의 자세입니다. 한결같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순종에는 따짐이 없습니다. 계산이 없습니다. 또한 순종은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야 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냥’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고,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로 시작되는 12∼13절 말씀은 우리에게 순종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순종이 우리의 믿음의 전부임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보다 더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믿음이 가능하겠느냐는 물음의 답은 우리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구원의 근거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이가 자신을 구할 이를 굳게 잡듯, 우리는 용기를 내어 나아가 예수님을 잡아야 합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 말씀을 의지해서 주님께로 가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로 우리가 나아가는 용기와 순종입니다. 믿음에 용기를 내십시오.
[오늘의기도]
사랑이신 주님, 죄인인 저희들에게 믿음을 주시어 말씀을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구원의 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통곡과 눈물의 복된 길
[본문말씀]
히브리서 5: 1∼10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 7)
[묵상내용]
“누군가를 위해 속에서 터져나오는 울음으로 기도하여 보았는가? 연민으로 가득 차야 그럴 수 있다. 억지로 쥐어짜서는 될 일이 아니다. 교만과 허위에 기초한 기도는 죄악이다. 자신과 남을 향한 참된 연민은 이해관계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칭찬과 칭송을 받는다는 허상에 빠지지도 않는다. 의롭다는 거짓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진실과 사랑 이외에 어느 것도 덧붙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통하는 복된 길이다.” 형식적인 기도를 건성으로 드리다가 놀라, 제 자신을 돌아보며 쓴 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가정과 교회에서 신앙의 부모와 선배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또 배운 기도를 우리도 가르칩니다. 기도에 관심이 많아지면 기도를 제대로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제대로 하는 것입니까’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같았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기도를 배우기를 원했고 예수님에게서 기도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배운 주기도문, 예수님의 기도는 그래서 우리에게 특별합니다. 누구나 다 기도할 수 있고 또 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기도를 이렇게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7절, 표준새번역).” 우리와 혈육을 나누어 가지신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통곡과 눈물로, 그만큼 절실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을 위해 주님처럼 기도한다면, 우리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눈물과 통곡의 기도 속에 우리 모두의 복된 길이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복과 위로를 받게 하소서. 아멘.
[묵상내용]
서울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응암 어린이공원’에는 1956년 9월 22일 하나의 추모비가 옮겨져 놓였습니다. 비에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요한복음 15장 13절 말씀이 새겨져있으며,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라는 좌대석이 추가로 놓여있습니다. 또한 대전 목원대학 구내에는 쇼를 기념하기 위한 예배당도 건립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해밀턴 쇼(William. H. Shaw)를 기리기 위한 것인데, 한국인들은 왜 그토록 쇼를 기리고 있는 것일까요?
해밀턴 쇼는 윌리엄 쇼 선교사(William E. Shaw)의 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진격 해군장교로 참전한 후, 미 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로 내한하여, 한국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였고, 제대 후 한국선교사를 목표로 하버드대학에서 연구하다가 6•25가 발발하자 해군 대위로 다시 입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는데, 서울 수복 진두지휘 중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의 인연으로 외아들을 잃었던 그의 아버지 윌리엄 쇼는, 아들이 전사하자 그를 기념하기 위해 모금된 헌금으로 대전에 교회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Shepard) 부인이 헌금한 6천 달러를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 관장으로 봉직하였습니다. 또한 감리교대전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하고, 신약학 교수로서 한국을 위한 헌신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한국인에게 크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인 아데린 H. 쇼(Adeline Hamilton Shaw,1895-1971) 선교사는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한국의 교육을 위해 일했습니다. 며느리 조니타 로빈슨 쇼(Juanita Robinson Shaw)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세브란스 병원에 사회사업실을 개설하였고, 큰손자 로빈슨은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사업과, 한국대학생을 위한 교류에 힘썼습니다. 어떠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쇼의 가족 누구 하나 각별한 사랑으로 한국을 보살피지 않은 분이 없었습니다.
너희도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본문말씀]
로마서 1: 1∼15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롬 1: 6)
[묵상내용]
종교개혁자 칼뱅은 그의 불후의 작품인 『기독교강요』에서 ‘이중지식(Duplex Cognitio)’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중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인데, 칼뱅은 나를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연유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을 알 때 나를 바로 알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생긴 나를 아는 지식은, 또다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확장된다는 것이 바로 이중지식입니다. 더 나아가 칼뱅은 이 이중지식이 꼬리를 물고 계속 연결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나에 대한 지식은 그러므로 일그러진 지식일 뿐입니다.
로마서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나온 자기에 대한 이해 속에서 자기를 소개합니다.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사도 바울은 자기를 제대로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추어 자기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택함과 세움을 받은 사도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로마서를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자기뿐만 아니라 편지를 받게 되는 로마의 성도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 위에서 나를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서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그래서 자기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오늘도 이 하나님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우리가 힘써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서 나 자신을 알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역을 오늘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아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본문말씀]
로마서 1: 16∼25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 17)
[묵상내용]
신부 루터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의롭지 못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고뇌 가운데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지 로마를 순례해보거나 성물(성자의 유골 등)을 가까이하기도 하고 고행을 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노력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해결은 하나님의 의에 있었습니다. 내게서는 그 어떤 의로움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는 가운데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은혜의 깨달음 가운데,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온통 다른 것에 매달려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당시의 교회를 보면서 자기가 시무하던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재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것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력구원의 종교이고, 둘째는 타력구원의 종교입니다. 자력구원의 종교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참선, 고행 등을 하며 혹은 선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믿음체계죠. 대부분의 종교들이 이 자력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타력구원의 종교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는 구원 얻을 길이 없으며 구원을 위한 어떤 외부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 23).”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구원으로부터 멀어져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소망 없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믿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패역한 인간
[본문말씀]
로마서 1: 26∼2: 11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 28)
[묵상내용]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인류 최초 범죄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은 것이 그토록 패역한 범죄였을까요?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범죄의 핵심은, 사탄의 유혹에 따라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 5).” 사탄의 유혹의 핵심이고 인간범죄의 핵심이 바로 이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내 삶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모든 시도입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인데, 그는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편지를 쓰는 이유를 밝힌 후에 복음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복음이 필요한 인간의 상황, 곧 죄에 물들어있어서 소망이 없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한 오염 때문에, 자기가 마치 자기 삶의 주인인 양,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본질적으로 싫어하는 인간의 패역함, 바로 이 상황이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죄의 열매들이 나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등 죄의 열매들을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죄의 뿌리,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실한(타락한)’ 마음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공연히 악을 행하고, 심지어 이런 자들을 옳다고 할 정도로 오염된 것이, 구원이 필요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여전히 상실한 마음 속에서 죄악 가운데 헤매고 있을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정말 몸서리쳐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씻어주시며,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그 큰 은혜를 생각하며 오늘도 부단히 주권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그리스도인, 그래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고 전해지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기도]
하나님이 온 천지만물의 하나님 되심을 만방에 선포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께 영광을
[본문말씀]
로마서 2: 12∼24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 23∼24)
[묵상내용]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축구선수가 공을 차는 훈련을 하듯, 하나님 백성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악한 영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악한 영들은 하나님을 떠나 살도록 유혹합니다. 믿음에서 멀어지도록 유혹합니다. 세상일에 너무 바쁘고 분주해서 영적인 일들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먹고 사는 일에 끌려다니며 살게 합니다. 사는 것을 재미없다 느끼게 합니다. 생활에 기쁨도 없고 활력도 없게 만듭니다. 돈 벌고 돈 모으는 일 외에 다른 일에는 별로 재미를 갖지 못하게 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 12).”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모습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자녀가 승리하면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면, 예수님 당시에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던 유대인들과 같은 자가 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택함을 받고 율법을 받은 자들이라고 자랑을 하면서도 정작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3∼24절)” 라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능히 세상적인 것들을 좇지 않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우리들이 하나님 말씀을 자랑하고 전하며, 능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여주소서.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자들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그래서 주님이 필요합니다
[본문말씀]
로마서 2: 25∼3: 18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 9)
[묵상내용]
바울 사도는 우리를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질그릇과 같이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깨어지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지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연약할 뿐 아니라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유대인들도 ‘죄 아래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사나 장로, 집사나 권사 등 직분을 받은 사람들도 ‘죄 아래에’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23∼24)” 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죄의 세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악한 영이 끊임없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3∼18절).”
이 같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권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죄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날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입술로 고백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 주소서. 아멘.
죄인들이 모인 천국
[본문말씀]
로마서 3: 19∼3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24)
[묵상내용]
알콜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며 돕는 〈AA (Alcoholics Anonymous)〉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은 알콜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12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 중 제일 첫 번째 원칙은 “우리는 이것(알콜) 앞에서 무력하며 이것(알콜) 때문에 우리의 삶이 통제 불가능해졌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일반 환자들은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을 인정합니다. 나에게 위장병이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나에게 당뇨병이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을 먹고 의사의 조언을 듣습니다. 그러나 정신질환이 있는 이들은, 자기가 병든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습니다. 치료는 스스로 문제를 인정하고 직면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고쳐주셔야 합니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를 치료하여주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고백하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에 훌륭한 공헌을 한 과학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사회에 많은 기부를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는 죄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써만 구원받은 천국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만이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천국백성들이 모였으니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의인들이 모인 천국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천국입니다. 단지 자기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절).” 이것이 교회 안에 있는 죄인들이 날마다 하는 고백입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나의 몸과 마음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여주소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충만히 임할 것을 믿습니다. 아멘.
올링거 Franklin Ohlinger, 미북감리회
[묵상내용]
‘조선의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목사를 소개하려 합니다.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창식은 철들면서 농촌생활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여기고 열다섯 살 되던 해,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의 집 머슴살이나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 서울 장안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서양사람들이 조선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두어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더라.”
이 소문의 진상은 이랬으니, 1888년 여름, 3년 전 서울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데려다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할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흥분한 사람들이 소문의 진위도 확인하지 않은 채,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에 난입하여 집기들을 때려부쉈고, 그 바람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른바 ‘영아소동(baby riot)’입니다. 당시 결혼하여 남대문 안에 살던 김창식은 어느 선교사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를 ‘요리사’로 승진시켰고, 정중하고 예절 바르게 대해주었습니다. 나랏님(고종)과 자주 만난다는 높은 신분임에도, 하인에 불과한 그에게 보내는 선교사의 눈길과 손길은 따뜻하기만 했습니다. 하인을 인간취급도 하지 않은 조선 양반들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는 선교사에게 감동했으며, 그들의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김창식은 마침내 개종을 결심하였고 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목회자 수업을 받아, 결국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바로 김창식을 새 삶으로 인도했던 분이 올링거 선교사입니다. 올링거는 본래 1870년부터 중국선교사로서 상하이 감리교활판소에서 활동하며 문서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올링거 선교사를 불러들여 삼문출판사를 맡겼고, 결국 올링거는 내한하게 됩니다. 그는 배재학당에 서구식 인쇄기와 주조기를 설치하고 삼문출판사의 업무를 시작했고, 많은 기독교 단행본과 성서, 배재학당 교과서 등을 출판해내며, 한국 출판문화의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김창식의 일화를 통해 보았듯 진실하고 따뜻한 목회자였던 올링거는, 1888년 인천내리교회를 개척 설립하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는 정동교회를 담임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신앙인의 행복
[본문말씀]
로마서 4: 1∼12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 7∼8)
[묵상내용]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연구하고 방법을 강구해보지만, 정작 행복을 만끽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인생은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요? 불행의 본질적인 원인은 죄에 있습니다. 죄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여김을 받고 행복을 누렸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여기심 받은 사람은 행복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윗이 믿음으로 받은 행복(6절)에 대해서는 시편(시 32: 1∼2)을 인용하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근본적인 행복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향락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죄의 복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이 위대한 이유는, 불법으로부터 사함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7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불법은 패역한 죄로서 공공연하게 내놓고 범한 죄를 의미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불법의 죄는 마침내 사망에 이르렀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롬 5: 12).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불법을 사함 받았습니다. 이것을 체험한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시 32: 1∼2).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 선고공판을 기다리며 가슴 졸이며 살던 죄수가 무죄선고를 받았을 때의 그 행복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행복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의 행복은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최대의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 행복을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나의 죄와 허물이 온전히 씻음받았다는 구원을 늘 확신하여 존재의 기쁨이 넘치게 하소서! 아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
[본문말씀]
로마서 4: 13∼25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 20)
[묵상내용]
80 평생을 자녀도 없이 외롭게 살아오신 어느 할머니가 있습니다. 이 분은 꽃다운 10대에 신랑과 결혼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남편이 일제의 징용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꼭 살아서 돌아오겠노라고 약속을 하였지만 종내는 아무 소식도 없어, 이 할머니는 결국 징용 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평생을 혼자 사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남편이 ‘오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약속만 믿고 기다리다 보니 자기 생애가 다 끝났더라고 하시면서, 지금도 그 약속을 버리지 않고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온,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님과 나그네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곧 약속을 굳게 붙잡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과 신뢰심이 어떻게나 강한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히 11: 13)”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산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약속을 믿고 그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18절). 믿음이 있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였고, 그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20절).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그것을 하나님께서 또한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기에(21절), 하나님은 이를 저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22절).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손에 잡히는 실재보다 오히려 약속 자체를 더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 그들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한 가지 남아있는 약속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구름 타시고 이 땅에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어린양의 신부로 단장되어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소유냐 존재냐
[본문말씀]
로마서 5: 1∼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 11)
[묵상내용]
결혼한 부부가 날마다 사랑한다는 고백만 하면서 산다면 그것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부부입니다. 그들은 서로로 말미암아 행복하게 되었다는 고백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사랑만 강조하는 것은 아직 이기적이요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 상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의의를 충분히 긍정하는 성숙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 그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면서 사는 신앙이 성숙된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소유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여야 행복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물질, 더 많은 명예와 실력을 갖고 행복하려고 하지만, 결코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존재’에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환경과 생활의 변화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 그리고 옛날 믿음의 선배들은 존재에서 행복을 찾았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고통과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인생의 행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인간의 행복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쾌락을 누리는 것, 동물적인 본능과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느끼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 그것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영적인 즐거움이요, 순간이 아닌 영원한 쾌감이요,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가치있는 즐거움과 행복은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르게 사는 삶과 의미있는 삶입니다. 죄의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지 않는 바른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더불어 사는 사람과 화평을 누리는 의미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즐거운 인생입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하나님과 막히지 않고 더불어 살며 이웃과 화평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
[본문말씀]
로마서 5: 12∼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롬 5: 21)
[묵상내용]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의 일입니다.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전라도 남원 ‘오수’라는 마을에 살았습니다. 그는 개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어디를 가나 개와 동행하였습니다. 하루는 김 씨가 이웃 동네의 환갑잔치에 갔다가 만취되어 돌아오던 중, 산길에서 잠시 쉬다가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그가 피우던 곰방대에서 불이 옮겨붙어 주위가 삽시간에 불길로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그의 개는 몇 번이고 가까운 개울로 가서 자기 몸에 물을 적셔와 온 몸을 굴리며 불을 껐습니다. 덕분에 김 씨는 살았으나 개는 지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술에서 깨어 일어나 이 사실을 안 주인은 너무도 감격하여 그 자리에다 개를 위한 무덤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는데, 지금까지도 살아서 커다란 나무가 되었습니다. 개도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21절).”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은 죄의 용서까지도 포함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에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스스로 의미 없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죄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많은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는 동안 하나님 앞에 지은 모든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하여짐을 고백하는 생활이 곧 신앙인의 삶입니다.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향해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날마다 성장하여 당신의 온전한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를 깨닫고 기억하여 호흡이 있는 순간마다 자녀로서 성화된 온전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
[본문말씀]
로마서 6: 1∼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 11)
[묵상내용]
한 교통경찰이 자동차사고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증인들을 면담한 뒤 운전자 중 한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사고의 모든 책임이 그 운전자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이 신중하게 사고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중에, 잘못을 범한 운전자가 무언가를 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 지금 무엇을 먹고 있소?” 운전자는 “당신이 작성한 사고보고서를 먹고 있는 중이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운전자는 사고보고서를 먹으면 자신의 잘못이 감춰질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신속하게 다음 조치를 취했습니다. 증인들을 다시 찾아내 증거들을 재수집한 뒤 새로운 보고서를 완성했습니다. 물론 그 운전자에게는 가중처벌까지 추가됐습니다.
죄가 있으면 인정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죄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보고서를 먹는다고 그것이 감추어질 리 만무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절).”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죄의 권세 아래 매여있었지만 예수를 알고 난 이후부터 우리는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나아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생명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하나님 앞에 나를 바치는 싸움’이라고 생각해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그 원리만큼 우리가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요 12: 24). 우리는 생명의 자녀로 거듭난 이후 죄에 대해서는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존재의 본질적인 변화를 전제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생명의 자녀로서 살아있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에 합당한 분량대로 삶을 풍성히 이어가되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 아닐까요?
[오늘의기도]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시고 생명의 자녀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참다운 생명을 누리는 저희들로 세워주소서. 아멘.
사무엘하 14: 1∼20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삼하 14: 14)
[묵상내용]
예수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 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peacemaker)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도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 때문에 단절되어있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이 되셔서 가로막힌 담을 허무시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던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확실한 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 18).”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해야 합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압살롬은 이복형제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하였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은 압살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암논을 생각하여 슬퍼하였습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갔습니다. 암논의 죽음은 점점 잊혀지게 되었고 다윗 왕은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요압은 한 지혜로운 여인(드고아에서 온 여자)에게 할 말을 일러주어 다윗을 설득하게 합니다. 이에 다윗은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요압과 여인이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 사이에 다리를 놓았던 것입니다. 매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사람 사이에서 다리가 되고 중매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 세상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평화를 위하여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인 저희들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