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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제 목 :   해서와 관동 그리고 전라도
ㆍ날 짜 :  2006-03-19 Sun.  Prev Next ㆍ조회수 : 3,299 
제목 없음
해서와 관동 그리고 전라도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 신앙의 지역적 전개는 그에 대한 조정의 차별적인 대응 양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즉 해서(海西)와 관동(關東) 지역에서의 기독교 신앙과 전라도 진산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조선조의 대응양상이 각각 달랐던 것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조선 인조(仁祖) 이후 싹을 내기 시작하여 영조(英祖) 때에는 해서와 관동의 민간인 사이에 상당히 넓게 보급되고 있었다. 제사를 폐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그때 조정에서는 그것을 일반 백성의 무지한 소치로 보고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조 때에 와서도 해서지방에 사학(邪學)이 퍼져 집집마다 사당을 부수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였던 일들을 비탄하고 그 세력이 해서지방으로부터 관동지방에 이르렀음을 고발하는 상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학(正學)이 바로 서면 사학(邪學)은 스스로 자멸하리라고 보아 그 현상을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 당시 조정의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 정조 신해년(辛亥年)에 와서 전라도 진산의 유학자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기독교 신앙을 묵수한다고 하여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때 조정의 대응 양상은 전혀 달랐다. 이들이 나라의 양식을 깨치고 백성을 미혹한다고 해서 참형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1791년의 신해교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톨릭교회 신앙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 양상은 그 신앙의 지역적 소재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해서와 관동 지역이 조선조에서 가졌던 무게는 전라도 진산의 그것과는 전연 달랐기 때문이다. 전자는 말하자면 정치적인 오지와 지리적인 오지였다. 그러나 후자는 나라의 제도나 정치 및 정학(正學)의 중추를 지켜 나갔던 사대부들의 집성지였다. 두 지역 다 제사를 폐하는 일이었으나 그 사회적 반향이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조에서 양 지역이 가지는 실체적 의미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나라의 중추를 지켜 가던 사대부들이 가톨릭 신앙을 이유로 해서 폐사의 일로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조선조의 체제와 정통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조선조의 박해와 가톨릭교회인의 순교는 피할 수 없었다.

 

Posted by 차동신   200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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