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진실한 청지기의 삶
[본문말씀]
누가복음 12: 32∼48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가 누구냐 (눅 12: 42)
[그림QT] 십자가 묵상
편안한 잠
[묵상내용]
본문에서 예수님은 주인과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주인이 언제라도 종을 호출할 수 있는 바, ‘종이 언제라도 깨어있어 주인을 기다리고, 주인이 맡긴 일에 성실하게 열심을 다하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실함이 있으면 그 종은 주인으로부터 복을 받게 될 것(38절, 43절)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종의 모습을 성경에서는 ‘준비하고 있음(40절),’ ‘지혜 있고 진실함(42절)’이란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청지기의 요건이요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각기 재능대로(마 25: 15), 각각 주신 대로(고전 3: 5) ‘맡은 자(고전 4: 2)’입니다. 몸, 시간, 재능과 일, 가족 등 어느 것도 스스로 취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분은 ‘맡은 일에 충성(고전 4: 2)’입니다. 바울은 곳곳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고전 3: 10, 15: 10)’ 충성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증언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 27).”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 자신과 가족, 시간과 물질, 재능, 그 재능으로 감당하는 일들을 하나님께 허락받고 위임받은 은혜와 사명으로 바라보십니까? 이것을 아는 신령한 안목이 우리를 겸손하게도 하고, 진지하게도 하며, 순종과 헌신의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 준비하며 행하는 일’입니다(47절).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을까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딤전 4: 5). 말씀은 성경으로 증거된 계시이며,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입니다. 항상 깨어있고 지혜롭고 진실해야 합니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43절).” 그러나 냉정한 심판과 형벌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45∼48절).
우리의 삶의 자리와 영역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맡기신, 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실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며 갚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오늘의기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더하여 받는 복된 삶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개신교회가 전래되던 무렵 근대 한국은 민족의식을 새삼 강조하고 또 그 형성을 예민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본디 오랜 세월 단일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가져온 한국이지만 조선에 들어와서는 두 차례의 전란과 더불어 서양 문명국의 위력을
직간접적으로 겪어 오던 터였다. 더욱이 쇄국의 방침을 굳건히 고수하던 그때 민족의식의 강조는 쇄국의 한 방책으로서 채택되고 있었다. 외국은
그것이 서양이든 일본이든 우리 민족이 아닌 바에야 국가와 민족 정체성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필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지난
100년 동안 반민족적 인상을 굳게 심어 온 가톨릭교회의 역사로 인해 기독교 문명국인 서양은 더욱 의심스러운 대상이었다.
이는
동학(東學)이 처음 예수교를 대했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1893년 3월 16일 예수교에 대한 동학의 실질적인 반발이 가시화되었다. 동학도가
광화문에서 교조 신원을 위한 복합 상소로 호곡하던 때였다. 그때 미국 선교사 기포드(D. L. Gifford)의 학당 문전에 ‘야소교 배척
방문’이 나붙는다. 그리고 얼마 후 4월 초에는 감리교 선교사 존스(G. H. Jones)의 집에 ‘목사 퇴거 방문’이 첨부되었다.
“혹세무민(惑世誣民)과 이단성이 가득한 이 종교가 조약 중에도 없는 전교를 함부로 하고 교육을 빙자하여 양가 자제들을 개종시키고 있어 그
비루함이 이에서 다시 없다”고 하면서 기한부 퇴거를 협박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894년 7월 동학의 거센 움직임이 다시 일어날
때 예수교에 대한 자세에 변화가 나타난다. 이때 동학의 투쟁 목표는 왜의 오랑캐를 진멸하자는 것이었고 따라서 서양 배척의 항의는 빠지고 있었다.
서양과 일본 배척의 주장에서 일본 배척의 주장으로 동학의 투쟁 목표가 전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일본과 서양은 하나가 아닌 둘로, 다른
것으로 경험된 것이다. 그해 12월 동학계에서 발표된 문서에는 도는 다르나 척왜와 척화는 그 뜻이 일반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본을 배척하자는
척왜와 외국과의 화약을 배척하자는 척화가 쇄국의 시대에 조선의 일반적 정서였다. 그런데 ‘도는 다르지만’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믿고 있는
종교가 달라도 척왜와 척화에서 하나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교의 척왜성이 그때 이미 눈에 띌 만큼 현저하게 표면화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