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사무엘상 25: 23∼44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삼상 25: 31)
[묵상내용]
남편 나발이 다윗을 홀대한 것을 알게 된 부인 아비가일은 급히 다윗에게 줄 온갖 선물을 챙겨가지고 다윗을 찾아갑니다. 그녀는 다윗을 만나자마자 나귀에서 내려 땅에 얼굴을 대고 다윗에게 절을 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아도나이(내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아마드카(내 주의 여종)’이라 호칭합니다.
다윗의 발 앞에 엎드린 아비가일은 참으로 지혜롭게 다윗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남편의 미련함을 용서해줄 것과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줄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다윗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남편의 잘못만을 일러바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이 없는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아비가일의 자세입니다(28절). 이런 아비가일의 말을 들은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비가일의 지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향한 하나님과 백성들의 평가에 대하여 생각해보라는 충고(?)까지 하게 됩니다. 아비가일의 말의 형식은 다윗의 선처를 바라는 간절한 간청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예언자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청탁하는 지혜를, 아비가일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다윗은 아비가일의 간청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으로부터 안전함을 확인받고는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결국 나발은 자기 재산을 꼭 움켜쥐고 조금이라도 내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는 모든 것을 다 잃고 죽게 됩니다. 아비가일은 그 후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여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바란 광야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 여기에 등장하는 나발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는 참 지혜와 참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다시금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 지혜와 참 생명은 자기 소유, 그 소유를 욕심껏 지키는 자에게 있지 않고, 주의 사람을 알아보고 자기를 낮추며,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헛된 제물에 저희 삶을 맡기지 않게 하소서. 참 지혜와 참 생명이 주님께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1898년 6월 10일, 조선 정부는 ‘인전교사’(因傳敎事)라는 호조(護照)를 발행한다.
호조란 당시 개시(開市)한 곳 이외의 지역으로 외국 거주인이 여행할 때 휴대해야 했던 일종의 여행권을 말한다. 따라서 ‘인전교사’라는 호조는
전도하는 일로 가도 좋다고 하는 선교 윤허의 첫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스왈런(W. L. Swallen) 선교사가 처음이었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가 입국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에서의 선교 윤허의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난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선교 실현의
원인을 되짚어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1895년 한국 교회 교세의 급격한 수적 증가를 주목하게 된다. 이때의 수적 증가는 당시 일어났던 을미사변과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일련의 역사적 상황에서 보여준 기독교의 충군 애국적 행동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회는, 민비 시해가 일제에 의해 외교 공관에서 음모되고 지휘된 사실을 폭로하고 이를 국제 여론에 공람시키면서, 일제에게 강력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민비와 같은 봉변을 피하게 하려고 계획되었던 춘생문 사건 그리고 아관파천의 드라마가 다 미국
선교사들과의 깊은 관련 속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전개된 반일의 태세에 선교사들이 순전히 정의감 때문에 동조하였고 마침내 한국과 선교사 곧
민족과 기독교와의 깊은 유기체적 일체감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교회에 조수처럼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을미사변에서 아관파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보여준 태도는 정교분리 고수라는 그들의 선교 방침에서 볼 때는 의아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라는 그들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반대하여 한국 민족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즉, 정교분리의 무심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기독교회는 바로 이러한 행동 때문에 민족의 가슴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기독교는 근대
한국에서 선교 자유를 우선 찾지 않았다. 살고 사랑해서 뭔가 남겨져, 그 선교 자유가 부여된 것이었다. 비숍 여사의 말처럼 “선교하는 이들의
따사하고 위엄있고 사랑에 넘치는 고귀한 영향이 하루의 매 시간 시간마다 감동으로 느껴져 남아, 사라지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