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야고보서 2: 1∼13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 9)
[묵상내용]
아름다운 세상은 어떤 곳일까요? 향기 나는 꽃과 잘 가꿔진 정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지난 해 6월 7일, 미국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장에서, 세계 제1의 부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 빌 게이츠는 명예학사 졸업장을 받는 자리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연설 중 감동을 준 몇 마디 말을 옮겨보겠습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하버드는 지성을 헌신할 수 있는가? (중략) 대학시절 가장 후회되는 일은 세계의 끔찍한 불평등을 깨닫지 못한 채 하버드를 떠난 것이다. (중략) 단 한 명의 삶을 살린다고 해도 짜릿할 텐데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전 재산을 그가 설립한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착실하게 진행 중에 있습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더 가난해져가는 세상,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다는 자본주의 세계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빌 게이츠는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정신은 성경에서 온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귀와 위엄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창 1: 27, 시 8: 4∼5).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람의 겉모양만을 보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왔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도 이런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부르셔서 새로운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겉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참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꾸며진 화려함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를 보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2∼4절). 사회나 제도가 부여한 지위나 능력보다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잠재력과 재능을 찾아내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5절). 그리고 무엇보다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 의식을 가지고 공평하게 대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6∼8절). 물론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이 우리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니다.
[오늘의기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이를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옵소서. 아멘.
[본문말씀]
마가복음 14: 66∼72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막 14: 68)
[묵상내용]
로마를 여행하는 순례자는 사도 베드로를 기념하는 2개의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티칸의 중심에 자리잡은 성 베드로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교회 카타콤베로 가는 길 옆에 초라하게 서있는 쿼바디스성당입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성당은 세계 최대의 규모이지만, 쿼바디스성당은 매우 작은 성당입니다. 이 두 성당을 떠올리면서 뭔가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큰 성당은 베드로가 벳새다 광야에서 했던 저 위대한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를 기념하고 있고, 작은 성당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또 다른 베드로의 고백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1절)”를 기념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똑같은 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전혀 다른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어느 베드로가 진짜 베드로일까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두 모습 모두 베드로의 참 모습입니다. 한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기도 하고 부인하며 저주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신의 신앙을 장담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노(老)신학자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셨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기도한다.” 아무리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는 좋은 뜻에서라고 해도, 구원 여부를 놓고 손을 들어 호언장담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 쿼바디스성당의 베드로가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 학생과 함께 길을 가던 랍비가 물었습니다. “만약에 길에서 큼직한 돈 보따리를 주웠다고 하자. 그걸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 한 학생은 누가 보는지 안 보는지 살피다가 보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가지겠다고 했습니다. 랍비는 너는 도둑놈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학생은 자신은 무조건 경찰서에 가서 주인을 찾아주라고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랍비는, 너는 아직 장담하기에 이르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학생은 자신이 그 돈 보따리를 어떻게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그 돈 보따리를 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주인에게 찾아주라고 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우리는 너무도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려주신, 우리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본문말씀]
열왕기상 10: 1∼10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왕상 10: 8)
[묵상내용]
지혜는 무엇인가를 많이 알고 있다는 말인 지식과 혼동해서 잘 쓰이곤 하지만, 분명히 다른 말입니다. 지혜를 ‘삶의 기술(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교 공부를 조금 덜한 사람도 살아가는 기술을 갖추고 있다면 즉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듯 자신의 삶을 가꾸어간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불을 피우는 것이나 짐승을 잡는 법과 같은 것이 지혜에 속하는 일이었지만, 현대에는 환경오염을 줄이는 일이나 암과 에이즈로부터 목숨을 지키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살아가는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이 되는 일 등이 지혜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남부 아라비아의 강국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하고, 엄청난 예물을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바는 인도와 아프리카 그리고 베니게까지 국제무역을 하던 나라로, 황금과 보석 그리고 향료가 주된 상품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마 12: 42), 스바 여왕은 무엇 때문에 솔로몬을 찾았고 또 그 많은 예물을 바쳤을까요? 그것은 솔로몬에게서 지혜를 배우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바 여왕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솔로몬에게 던졌으나(1절), 솔로몬이 대답하지 못하는 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궁궐과 성전을 보고 그의 지혜로움에 정신이 나갈 정도였습니다(3∼5절). 그러니까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배웠고, 그 값으로 예물을 바쳤던 것입니다.
바른 교육, 혹은 참교육을 외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르지 않은 교육이, 거짓 교육이 판을 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이 교육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순진하고 약한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참교육이란 올바른 삶의 기술(예술)로 자기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과 누리고 있는 모든 복을,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청지기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솔로몬의 가장 큰 슬픔은, 그가 받은 지혜를 돈으로 팔았다는 데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잠 23: 23).
[오늘의기도]
지혜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항상 생각나게 하시고, 그런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본문말씀]
마가복음 15: 12∼20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막 15: 15)
[묵상내용]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을 먹을까? 누구를 만날까?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떤 길로 가야 하나? 모든 순간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인생 전체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참 잘했다’고 만족하기도 합니다.
로마총독 빌라도도 그런 순간에 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석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마 27: 23). 그런데도 군중들이 악을 쓰며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소리지르자 그는 자신의 판단을 중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어주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하지만 그에게도 잘못된 습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 눈앞에 보이는 여인들을 더 사랑하는 습관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방의 우상들이 온 나라를 뒤덮게 되었고, 나라를 분단시키는 죄를 범했습니다(왕상 11: 12).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믿음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인 습관을 확고하게, 또 바르게 들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산토끼를 잡으려고 다니는 사람들은 한 길목에 덫을 놓습니다. 처음 그 자리에서 한 마리가 잡히면 당분간 다른 토끼들이 그 길로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 정도 시일이 지나면 토끼들은 습관적으로 다시 그 길로 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금방 다시 덫에 걸려 죽습니다. 습관이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좀 힘들고 어려운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 쪽으로 방향을 틀어놓고 살아야 합니다. 처음 믿을 때부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훈련을 받고, 그대로 삶의 습관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즉 여러분이 가진 은사와 소유를 가지고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머지,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것을 다 더하여주십니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이 세상에서 습관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습관적으로 예수님 쪽으로 길을 선택하고, 습관적으로 하나님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마가복음 15: 21∼32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막 15: 24)
[묵상내용]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주위의 사람들이 경건해지고 조심하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자신이 죽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군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의 옷가지를 누가 차지할 것이냐?’에만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제비뽑기를 해서 옷을 나누어가졌습니다(막 15: 24). 다른 사람의 고통과 죽음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 물건을 내가 차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군인들만 그랬겠습니까?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제 손에 무엇인가 움켜쥐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과 은혜가 없습니다. 악다구니 속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구세주이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주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겨우 썩어질 천조각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무엇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 군인들처럼 내 손에 움켜쥐어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멸망하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약 1: 15).
선지자 엘리사가 활동하던 때 게하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치유하시는 기적과 능력을 엘리사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 기적을 본 게하시의 마음은 딴 데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나아만으로부터 돈을 받아서 정원을 사고, 양과 염소를 사고, 하인과 하녀를 부릴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왕하 5: 26).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의 대가는 나병이었습니다(왕하 5: 27).
기독교의 생명은 결국 썩어지고 말 옷 몇 조각을 움켜쥐고 확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그 피로 내 죄가 씻음받고 새롭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영생과 영원한 축복, 영원한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오늘의기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오직 십자가 은혜와 능력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마가복음 15: 33∼39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 34)
[묵상내용]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과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버림받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세 번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첫 번째는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을 때, 로마제국 즉 세상 권력으로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유대 대제사장과 성전의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때, 기존 종교체제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세 번째는 놀랍게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34절)”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다니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버림받는 자리에 내 대신, 우리 대신 서신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받아야 할 죄 값입니다. 그 죄인 된 사람들이 당할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당하고 버림받으셨습니다.
주님의 버림받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롬 5: 8). 만약에 예수님께서 성인(聖人)으로 죽었는데 부활하셨다면,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성스럽게 사는 사람들만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 죽으셨다면 예수님의 은혜로 그런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영으로만 십자가형을 당하셨다면 육신을 입고 사는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권력, 기존 종교체제, 더 나가서 ‘하나님에게서’조차도 버림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 목마르고, 지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 된 모든 사람의 구원자가 되시고, 버림받음이 ‘끝’이 아님을 선언하시며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 20∼23).
주님의 십자가 지심이 우리에게 은혜요, 주님의 목마름이 우리에게 감사요, 주님의 버림받음이 우리의 감사제목이 됩니다.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주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9절).
[오늘의기도]
인간으로 오셔서 죄인으로 죽으며 버림받고, 고난받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저희도 저희의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에 주님 사랑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레이놀즈 William Davis Reynolds, 李訥瑞, 1867-1951, 미남장로회
[묵상내용]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출생한 레이놀즈는, 햄덴 시드니대학 재학 중 남달리 어학에 재능을 보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이 달란트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외국선교를 꿈꾸게 되었고, 결국 1892년 11월 3일 한국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이렇게 미국 남장로회가 선교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하여 첫 번째 활동으로서 미남장로회 선교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893년 1월에는 미북장로회와 연합하여 공의회를 조직하였고, 그곳의 초대 의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때 공의회의 선교지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선교구역의 예양협정(禮讓協定)을 체결하였습니다. 전도 대상자는 부녀자와 청소년을 우선하였으며, 성경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사용하기로 하는 등 한국선교의 개척을 위해 그 기틀을 마련해나가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그는 1895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의 미남장로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896년에는 전주에 선교본부를 설치하면서, 1887년 여름 전주에서 다섯 사람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교회건립을 통해 레이놀즈 선교사는 호남지방 선교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가 가지고 있었던 어학의 재능으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할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언어학자와 성서번역가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게일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1895-1938) 성서번역에 종사하면서 1900년 신약성서를 완역하는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 구약성서 완역에도 독보적 구실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달란트로 몇 배의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는, 1911년 독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1917년부터는 평양신학교 교수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폭넓게 헌신하였습니다. 1937년 은퇴하기 전까지 45년이라는 시간을 한국에 머물면서 말입니다.
[본문말씀]
마가복음 15: 40∼47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 6)
[묵상내용]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 5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장사할 무덤조차 없으셨습니다(43∼46절).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세상적으로 볼 때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시신을 장사할 무덤조차도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삶입니까?
만약 이것이 내 모습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이것이 자기 모습이라면 고통스러워하며 슬픔으로 평생을 지낼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바로 나를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떠날 세상에 자기소유의 집과 재산을 마련해두려고만 합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에 집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미물에 불과한 여우와 공중의 새에 자신을 견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탄식으로 들리십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장사할 무덤이 없었다는 사실에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하십니까? 과연 그분이 이 땅에서 불행하게 생을 마치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비천하거나 비굴한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불행한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가장 행복하신 분이셨고, 가장 평안하고 온유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비천한 자의 존엄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영원하신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취하실 필요도 없으셨고, 또한 취하실 것도 없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 것도 취하시지 않으시므로 영원한 천국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잠깐이며 천국은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시고, 천국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빌 1: 10)”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기도]
세상과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마가복음 16: 1∼2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 16: 19∼20)
[묵상내용]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외롭게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모든 제자들이 실의에 빠졌습니다. 이들 가운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주님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 21).”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사건으로 인해 제자들은 메시야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어버렸습니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죽음이 더 큰 구속 즉 영적인 구원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메시야가 자기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길을 떠나기 전에 이미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똑같은 인간의 죽음으로 생각하고 실망하며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믿음으로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들은 가던 길에서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남은 제자들의 증거를 듣고 자신들도 길에서 있었던 일을 증거했습니다(눅 24: 3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이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입증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실망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항상 그분께서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제자들이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처럼, 우리도 혼자 걷는 길에서 나와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로 걸어가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의기도]
주님!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눈으로는 하나님나라를 보게 하여주소서. 또한 우리의 입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하소서. 아멘.
[본문말씀]
마태복음 2: 1∼12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마 2: 6)
[묵상내용]
예수님은 이전에 어떤 아기도 그렇게 태어난 적이 없을 만큼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무런 권위도 없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마구간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하늘에서는 천군천사들의 찬양이 웅장하게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 14).” 그가 오심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천사들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참된 평화와 하늘의 거룩한 영광이 마구간의 구유에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있을 곳이 없으셔서 마구간의 구유를 빌려야만 했었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마지막이 십자가였다면 처음은 구유였습니다.
참된 평화와 거룩한 하늘의 영광을 담고 있는 구유가 무엇입니까? 구유는 예수님이 가난한 모든 자들의 왕으로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왕 앞으로 나가는 것은 두렵지만, 구유에 다가갈 때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누구나 마구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런 격식이 필요없습니다. 만일 누구라도 그리스도에게로 오고자 한다면, 지금 모습 그대로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신 것은, 가장 낮고 천한 자들을 자기에게로 초대하시기 위함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비천한 자들은 누구나 얼마든지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계실 곳이 없어서 마구간의 구유로 내려오셨지만, 사실은 마땅히 오실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어리신 예수님이 자리하신 구유는 우리 인간이 처한 현주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로 물들어서 악취가 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오직 동물적인 본성을 충족시켜주는 곳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유는 인간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짐승들의 우리에서 태어나시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셨다는 것은, 누구나 예수를 만날 수 있고 아주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그분을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기도]
사랑의 주님! 저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정결케 하소서.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주소서. 아멘.
이사야 44: 24∼45: 7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 4)
[묵상내용]
여러분은 이슬람 문화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몇 년 전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이슬람 문화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영화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유대인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시키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영화가 유대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히 이슬람 문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그 영화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유대인들이…?” 결국 이러한 호기심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보게 만들었고 이 영화를 통해 많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성과 상식으로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도 자신의 기준 안에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으십니다. 아니, 인간들이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법들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바사의 왕 고레스 역시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해방을 소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이 아닌 다른 이방민족의 인물을 도구로 이용하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모든 세상의 주권이 하나님 아래에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인 피조물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어려우십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에 따라 은혜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지금의 성공을 나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교만에 빠지지 맙시다.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받아 제대로 쓰여지고 있는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의지하며 그 은혜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며,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