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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제 목 : |
게일 James Scrath Gale, 미북장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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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날 짜 : 2008-08-17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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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수 : 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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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내용]
1886년 매사추세츠 주 마운트 허먼에서 제1회 학생하령회(Summer Conference)라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미국과 캐나다 87개 대학에서 251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무디(D. L. Moody)가 이 집회의 강사였습니다. 무디의 영향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모두 다 가자, 모두에게로(all should go and go to all)”라는 구호 아래, 많은 청년들이 감화를 받아 외국선교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게일이라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게일은 특별히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그의 모교 토론토대학 기독청년회에서 파송하는 평신도선교사가 되어 1888년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로 오는 길에 당시 유행하던 전영병으로 죽은 시체들이 길거리에 내버려져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찬 이 청년에게 그런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25세의 이 청년은 교회에 가서 몇 달을 지내며 한국말을 공부했고 1890년 예수교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성서공회 전임 번역위원으로 봉사하게 되었고, 1891년 2월에는 미북장로교회 선교사 마펫과 함께 만주에까지 다녀왔습니다.
게일은 독립된 평신도 청년선교사였기에 교파적 배경이나 풍부한 재정적 후원도 없었던 고독한 선교사였고, 나중에는 그나마 있던 토론토대학 기독청년회의 선교지원비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게일은 1891년 8월 31일 미북장로회 선교부로 전적하여 더욱 열심히 헌신할 기회를 찾았습니다.
게일은 특별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애를 썼던 선교사이며 교육가이자 저술가였습니다. 1897년 4월에는 「그리스도신문」 주간으로 시작하여 「기독신보」로 바뀔 때까지 10여 년간 주필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그는 원산에 머물면서 수필집 『한국 만록』을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경신학교와 정신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문화를 사랑한 선교사로서, 서울의 역사 『한양』을 집필하고 『의회 통용 규칙』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1917년 5월에는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직해 찬송가 개편에 착수하기도 하였고, 1922년에는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해서 런던에서 출판하였습니다. 그의 단행본 저서는 43권에 이릅니다. 이렇게 게일은 한국문화와 문학에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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